새영화 ‘노르웨이의 숲’… 삼류 건달, 벌건 대낮에 산으로 간 까닭은?
입력 2010-09-17 19:26
인간의 폭력성이라는 주제에서, ‘노르웨이의 숲’은 화제작 ‘악마를 보았다’를 연상케 한다. 아무 이유 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패스가 있고 희생당하는 피해자도 있다.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와는 달리 이 영화는 ‘복수’라는 코드를 배제한다. 거창한 의협심이 아닌 소박한 양심에서 범죄를 말리는 인간을 등장시키고, 최후로 살아남는 사람들을 가장 어리석거나 약해 보이는 인물로 설정한다.
주된 줄거리는 조직 폭력배의 말단 중래(박인수)와 창욱(정경호)이 ‘형님’의 명령을 받고 시신을 암매장하러 산에 간 뒤 벌어지는 이야기. 이 둘은 형님의 엄명 때문에 시신을 직접 보지도 못했는데, 한눈을 파는 사이 시신이 없어져버린다. 이유는 간단하다. “시체엔 발이 달려”있으니까. 시신을 찾기 위해 둘이 소동을 벌이는 새 산에 있었던 고등학생들, 연인,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차례로 등장한다. 인가도 드문 산에 숨어든 이들의 공통점은 단 하나. 수상하다는 것이다.
‘B급’을 표방한 이 영화는 스릴러가 흔히 갖기 쉬운 클리셰(진부한 표현)를 근본부터 깨뜨리고, 주된 정서를 공포가 아닌 유머로 설정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섬뜩한 상황에서 던져지는 우스꽝스러운 농담이라든지, 애초 있지도 않았던 시체를 묻기 위해 계속 ‘삽질’을 해대는 깡패들의 행위는 영화 전편에 대한 은유이기도 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정신없이 웃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끝까지 예측하기 힘든 결말에도 불구하고, 손에 땀을 쥐는 스릴이 아닌 자포자기가 느껴지는 것 또한 이 영화의 특징이다.
시간적 배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대낮으로 설정돼 있다는 점 역시 흥미롭다. 모든 일들이 밤이 아닌 낮에 일어남으로써 영화는 보이지 않는 위험에 대한 공포 대신 명백한 위험이 닥쳐도 대처할 수 없는 인간의 무기력함을 보여준다. 중래·창욱 콤비의 소란스러움 가운데 스며드는 긴장, 사람을 묻고서도 고요하기만 한 숲,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 관객까지 그 무기력함에 감염될 때쯤, 차 안에서 창욱이 짓는 넋 나간 표정이야말로 영화의 결말 그 자체다.
거친 산 속에서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잘도 돌아다니는 서지윤의 매력과 함께 정경호의 호연이 빛나는 이 영화는 지난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상영작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위가 약한 관객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저지르는 영화 속 사이코패스의 존재를 견디기 힘들 듯. 18세 관람가. 30일 개봉.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