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상차리는 ‘젖은 손’을 본 적 있는가… 정복여 두 번째 시집 ‘체크무늬 남자’

입력 2010-09-17 17:47


한가위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한가위는 노동집약적 전통이다. 한가위를 민족의 대명절로 기리는 전통의 이면에는 여성의 보이지 않는 노동이 새겨져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남성들이 보름달처럼 눈에 보이는 세계를 지배했다면 여성들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끊임없이 청소하고 빨래하고 요리하고 먼지를 쓸어 모았다. 지금껏 그 노동은 사소한 것으로 취급받아왔다. 방을 청소하는 그녀들은 남편을, 가족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녀들은 그들의 파편을 주워 모았다. ‘행복이 가득한 집’이라든지 ‘홈, 스윗 홈’은 그녀들에게 과장된 표현인 것이다. 세계라는 거대성에서 떨어진 먼지를 주우면서 그 밤톨만한 찌꺼기로 세계를 복원한 시인이 있다.

첫 시집 ‘먼지는 무슨 힘으로 뭉치나’ 이후 10년 만에 두 번째 시집 ‘체크무늬 남자’(창비)를 펴낸 정복여(52) 시인이다.

“저기 한 무더기의 대낮으로/남편 실을 줄줄 풀어내는 파마 여자/그 실가락을 붙들더니 커트 여자가/시어머니 실을 턱 걸친다/이번에는 맞은편 민실타래/드문드문 아직 처녀의 실밥이 남은/새댁 실이 그 실 받아 걸고, 다시/굵직한 친정엄마 흰 타래가/돋을짜기한다 그 줄무늬 끝에/먼발치의 경비실도 기웃/회색 아버지를 풀까 말까”(‘아파트 살구나무 쉼터’ 일부)

여성의 삶은 무엇인가를 짜고 다시 풀기를 반복하는 행위의 연속이다. 그녀들은 남편을 짤뿐더러, 시어머니도, 친정엄마도, 아버지도 짜고 다시 풀기를 계속한다. ‘짜고 풀기’는 가사 노동의 다른 말이지만 그녀들이 아니면 누가 가사노동을 대신할 사람이 있었겠는가. 쌀 씻고, 양파 썰고, 걸레 빨고, 접시 닦고, 국 끓이는 이 모든 행위의 주체는 저 유명한 가요의 노랫말인 ‘젖은 손이 애처로워 살며시’에 등장하는 ‘젖은 손’이다. ‘젖은 손’을 시의 주체로 삼기는 정복여가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정복여는 가사노동의 고단함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하늘로 번지는 짜릿한 기도/바람이 휘이익 불어 낙타의 발자국도 가고/이제 나도 낙타로 없다/안장처럼 얹힌 밤이 있을 뿐/사막 어디쯤 날 떨군/그런 모래 사나이만 있을 뿐”(‘라자스탄 처녀의 방’ 일부)

‘모래 사나이’라는 말에 방점은 찍힌다. 여성들에게 모든 남성은 모래 사내인 것이다. 여성의 방을 들락거리는 모래 사내들. 그러니까 사내들이 가고 난 자리에는 모래로 상징되는 먼지만 남는다. 따는 사내가 잉태시켜 낳은 자식들도 모래이긴 마찬가지다. 자식들도 철이 들면 사내와 똑같이 방을 떠나기 마련이다. 주목할 점은 방안에 있는 시적 화자의 태도다. 그녀는 방을 장애물로 인식하고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거나 혹은 체념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방안의 이야기를 시작할 뿐이다.

“여기서부터는 이상한 진흙 바다/그래도 가끔 조개가 있어 진주가 큰다고 속삭이지/가다가 만나는 악어뱀, 그것도 귀여운 농담이라나/이 때야 의심이 타조처럼 성큼 오지만/까마득 발이 빠진 곳은/천년 전 누군가 덫으로 놓은 안방 정글”(‘체크무늬 여자’ 일부)

‘안방 정글’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잊어버리기 쉬운 ‘가사 노동’이라는 우리의 구체적 기원을 상기시켜준다. 정복여는 ‘안방 정글’이라는 표현으로 여성들의 허무주의를 슬쩍 보여준다. 그것은 시인이 일상을 낱낱이 분해한 뒤 자기만의 맥락으로 재구성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바람이 들어앉아/무슨 약속이라도 있었는지/팔랑 문지방을 넘어 들어가는/가랑잎 한 장/우리가 내다버린/연애나 동맹, 그리고 청춘 같은,/그 집 어디에도 우리는 없고/이제는 저 바람이 주인이다”(‘버려진 새장’ 일부)

추석을 앞두고 상차림을 하는 늙은 어머니나 아내의 뒷모습을 보면 이 시를 떠올릴 일이다. 귀한 집 딸로 태어나 뉘 집 며느리로, 시누이로, 엄마로 살아온 그들에게 쉴 자리는 정녕 바람뿐인가. 그녀들도 연애가 그립고 청춘이 그립다. 어쩌면 그녀들이야말로 가을밤, 지상에 내려앉은 보름달일 터이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