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되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 3가지 표정

입력 2010-09-16 18:08


눈물은 말라 버렸다. 북한의 이산가족 상봉 제의에 우리 정부가 상봉 정례화를 추진하고 있는 즈음에도 이산가족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상봉 대상자로 당첨될 확률이 낮아 진작 만남을 포기한 이들은 침착했다. 대한적십자사에 찾아와 오래 전 해놓은 상봉 신청을 재확인하는 노인들만 자기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다며 역정을 내거나 북녘의 누이 또는 어머니와 어떻게 헤어졌는지 더 자세히 설명하려 애쓸 뿐이다. 기다림은 고단함과 애절함으로, 이제는 시간의 기차를 타고 분노로, 포기로 그렇게 바뀌었다.

60년간 가족을 만나지 못한, 되풀이된 좌절은 이산가족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다. 상봉이니 정례화니 말이 나올 때마다 혈육과 만나리란 희망을 가지지 말 것, 희망에 기대다 안 되면 그 실망이 더욱 거대하다는 것, 그래서 그저 사는 데 집중하는 게 속 편하다는 것. 사람들에겐 상봉 행사 때마다 노모의 손을 잡고 엉엉 울며 큰절 올리던 흰머리 성성한 아들이 익숙할 테고, 그게 이산가족 모습의 전부일 것이다. 그러나 상처가 깊을수록 그 위에 내려앉는 딱지는 더 두껍기 마련이다. 대다수 이산가족은 겉으론 무표정한 얼굴로 하루를 살고 있었다.

“북한이 먹을 게 떨어져 만나자는 기야”

지난 14일 강원도 속초시 청호동 실향민촌 ‘아바이마을’은 여느 때와 같았다. 드라마 ‘가을동화’와 KBS 예능 프로그램 ‘1박2일’ 출연진이 찾아와 더욱 유명해진 아바이마을 음식점마다 어느 연예인이 다녀갔노라 선전하는 사진이 가득 붙어 있었다. 사진 속 개그맨 강호동의 표정은 코믹했고, ‘가을동화’에 출연한 배우 송혜교와 송승헌의 눈빛은 슬프고도 예뻤다.

6·25전쟁 당시 고향을 등지고 이곳에 피란 온 이북 사람들의 과거는 이제 관광지가 된 아바이마을의 아주 작은 조각일 뿐이다. 1951년 1·4 후퇴 때 국군을 따라 함경도 원산, 함흥, 청진 등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은 고향 가는 길목이면서 북한과 가까운 이곳에 하나 둘 모여 마을을 이뤘다. 전쟁이 끝나면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겠거니, 눌러 앉은 사람들은 소년에서 청년으로, 그리고 노인이 되도록 태어난 땅을 밟지 못했다.

“상봉 신청? 우린 그런 거 안 해. 월북한 사람들 가족이나 북한에서 상봉 신청 받아주지 우리처럼 북한 싫다고 일부러 나온 사람들을 북한이 받아주나.”

청초호 갯배(호수 양안을 연결한 철선을 잡아당겨 이동하는 배) 선착장에서 어구 손질을 하는 이산가족 1, 2세대 70대 노인 10여명은 기자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들은 말을 하면서도 어구 만지는 손을 쉬지 않았다. 튼튼한 어구를 만들어 더 많은 생선을 잡는 게 이산가족 상봉 같은, 기약할 수 없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 정부는 상봉 정례화를 향해 한 발씩 다가서고 있었지만 이산가족 1세대는 이미 대다수 늙거나 숨을 거뒀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에서 이산가족 상봉 문제가 합의됐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만 해도 아바이마을은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 뒤 17차례 상봉이 있었지만 이 마을 주민들에겐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다. 이제껏 단 1명만 상봉 대상자로 당첨됐다. 속초시의회는 조만간 아바이마을 주민들이 상봉 행사에 초청될 수 있도록 대한적십자사에 건의문을 보낼 예정이다.

이 마을엔 특히 함경도 출신이 많다. 그래서 할아버지, 노인을 뜻하는 함경도 사투리 ‘아바이’가 마을 이름이 됐다. 지금은 실향민 1세대가 70여명 남아 있고 2, 3 세대가 마을의 주축을 이룬다. 이제는 아바이가 된 1세대들은 노인회관이나 갯배 선착장 주위에서 화투를 치거나 소일거리를 찾는다.

“오늘 내일 오늘 내일 하는 늙은이들인데 헤어진 가족 만난다고 얼굴이나 알아 보갔어?” “먹을 게 떨어지니까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하자고) 저러는 기야. 여기매서 쌀 주고 비료 주는 거 서민들한테 하나도 안 가. 군인들 말고 백성들한테 쌀 주는 기야 뭐가 아깝겠어?” 노인회관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이산가족 1세대들은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세월이 약이라고 기다림을 견디며 살아왔기에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고향이 어디냐, 누가 이북에 남아 있냐, 몇 마디 더 주고받다 보면 연방 눈시울을 붉히거나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함경도 원산에서 태어난 김순화(81·여)씨는 59년 전 전쟁 중에 헤어진 남동생과 여동생 생각에 젊은 시절 늘 울고 다녔다. 그러다 먹고 사는 데 바빠 한동안 잊고 살다가 6년 전 금강산을 방문했다.

“금강산 관광을 갔는데 거기는 가는 데마다 초소가 있어. 한번은 초소 지키는 여자한테 내가 몰래 건포도를 주니까 받아먹더라고. 원래는 남한 사람이랑 말 섞으면 안 되는데 뭐가 통했는지 나보고 쉬면서 놀다가라고 해. 그 여자가 그러는데 서울에 사는 한 할머니가 자기한테 금반지를 주면서 ‘통일 되면 금반지 보고 내 생각하라’고 그랬대. 그 여자도 빨갱이지만 높은 사람들 감시 때문에 맘대로 말도 못하는 거 보니까 마음이 안 좋았어.”

“61년 만에 만난 아들… 꿈 꾼 것 같아”

지난해 6월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61년 만에 아들을 만난 석찬익(90)씨는 다리가 불편해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데다 노안으로 눈이 어둡다. “작년 상봉 때 북에 있는 아들을 만났는데, 하룻밤 꿈을 꾼 것 같아.”

1948년 홀로 월남해 서울에서 경찰 공무원이 된 그는 3·8선을 넘나드는 보따리장수에게 아내와 자녀들을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만 해도 경비가 삼엄하지 않아 길을 잘 아는 보따리장수들이 3·8선을 넘나들었다. 그러다 6·25전쟁이 났고 부부는 평생 이별을 했다. 곧 통일이 되겠지 기다리던 석씨는 1953년 남한에서 최화순(83)씨와 결혼해 아들 하나, 딸 셋을 뒀다.

그래도 늘 북에 둔 아내와 아들 생각에 수차례 대한적십자사에 찾아가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하고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기적처럼 지난해 상봉 대상자로 당첨됐다. 그는 상봉을 앞두고 금반지, 시계, 내복, 감기약, 청심환, 비누, 치약, 팬티 등을 보따리에 한가득 쌌다. 그러나 기다리던 아내는 거동이 불편해 금강산 호텔에 나타나지 않았다. 과수원에서 일한다는 아들(63)과 손자만 나왔다.

“막상 만나니까 대화가 안 돼요. 북한 기자라고 하는데 내가 봤을 때는 정보원들이 실실 다녀요. 무슨 이야기 들으려는 낌새가 보이더라고. 할 이야기도, 하고 싶은 이야기도 못 했고 그저 있었지. 손자 녀석이 북한 정치 얘기며 살기 좋다는 말을 하더라고. 귀에 들리지도 않는데 나한테 자꾸 설득을 해. 나중에 세월이 흐르면 역사가 증명할 거라고 말해줬더니 손자가 ‘그래요?’ 그러더라고.”

생각이 다르고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막상 만나면 서먹할지언정 석씨는 올해도 금강산에 가서 아들과 손자, 아내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내가 다리를 못 쓰니까 (남한에서 낳은) 아들이 업고 가야 하는데 그래도 갈 수만 있다면 좋지. 이젠 기억이 가물가물해. 고향 모습도, 아내 얼굴도.”

10년 전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누이동생을 만난 소설가 이호철(78)씨도 누이가 제대로 먹고 사는지 걱정이 깊어져만 간다. “만났을 때 나는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는데 누이는 불안해해요. 내가 이것저것 물어보니까 누이가 내 손을 살짝 꼬집더라고. 일부러 내가 ‘장군님께 충성하라’고 했어요.

“신청자 12만명 … 이번에도 안 될 것 같아”

헤어진 가족을 한 번 만나곤 그리움이 깊어져 가는 이들도 있지만, 죽기 전에 단 한 번이라도 만나고자 애 태우는 실향민이 대부분이다. 2000년 8월 15일 제1차 이산가족 상봉 이후 지난해까지 17차례 1만7100명이 헤어진 가족을 만났다. 지난 7월 말 현재 통일부에 등록된 이산가족 12만8129명 중 4만4444명이 사망했다.

15일 서울 남산동 대한적십자사 이산가족 민원실에 들른 오모(68)씨도 그렇다. 10년 전 상봉 신청을 한 뒤 매번 떨어진 그는 혹시라도 신청이 제대로 안 돼 있을까 봐 확인하러 대한적십자사를 찾았다. 함경도 함흥이 고향인 그는 1946년 헤어진 누나를 찾고 있다. 6남매와 아버지는 초소 군인에게 돈을 쥐어주고 3·8선을 넘었지만 당시 여섯 살이던 막내 누나는 함경도 흥남 외가댁에 맡겨졌다.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부친이 누나를 데리러 가려고 했으나 6·25전쟁이 터져 생이별을 했다.

“어머니께선 제가 세 살 때인가 돌아가셔서 큰누님이 동생들을 길렀어요. 시집가실 때도 ‘결혼 이후에도 동생들 대학 보낼 수 있게 돕겠다’는 조건 달고 가시고, 시집 식구들한테 떳떳하려고 일부러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에서 영어 타자를 치시면서 돈을 버셨어요. 큰누님이 지금 여든두 살인데 막내누나를 그렇게 만나고 싶어 해요. 살면 얼마나 사시겠어요.”

그는 6·25전쟁 직후 경기도 가평군 방일초등학교 교장이던 부친이 빨갱이로 몰려 동네 사람들에게 맞고 토굴에 잡혀갔다가 제자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도망 나왔던 얘기며, 나중에 알고 보니 같은 학교 교감의 모함이었다는 얘기며, 1·4 후퇴 때 이북에서 거제도로 피란 온 큰이모로부터 북한의 막내누나가 어떻게 살았는지 전해 들었다는 얘기까지 지나간 세월을 한참 풀어놓았다. 오씨는 침착하게 말했지만 큰누나와 막내누나 이야기만 나오면 입술이 떨리다 결국 휴지를 집어 눈가로 가져갔다.

“소원이 있다면 통일이 되는 겁니다.” ‘통일 비용’ ‘통일부’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 세상에 널리고 널려서 흔해빠진 단어가 ‘통일’이지만 오씨 입에서 나오는 ‘통일’은 달랐다.

그가 ‘통일’을 말할 때 누구보다 진지했고 눈빛은 간절했다. 1시간 동안 이야기를 마친 그는 “지나온 세월을 털어놔 마음이 후련하다. 오히려 고맙다”고 했다. 15일 오후 3시 햇볕이 유난히 강하게 내리쬐던 날, 오씨는 대한적십자사를 나서서 명동 쪽으로 향했다. 남은 이산가족 8만3685명 중 이번에 상봉하게 될 인원은 100명 안팎일 것이다. 그는 당첨될 수 있을까. 몇 분 만에 오씨는 명동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속초= 글 박유리 기자, 사진 이병주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