낳은 정 vs 기른 정… 값어치의 셈법은

입력 2010-09-16 18:07


낳은 정(情)과 기른 정.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지난 13일 두 인연의 경중을 가렸다.

천안함 희생자 고(故) 신선준 상사의 유족을 위한 국민성금 5억원을 모두 신 상사를 양육한 아버지 신국현(59)씨에게 지급키로 했다. 신씨와 이혼한 뒤 연락이 끊겼다가 27년 만에 나타난 어머니 권모(50)씨는 “낳아준 어머니의 권리”라며 절반의 몫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금회 측은 “성금은 국민이 주는 위로금이어서 국민 정서에 맞게 지급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법정에서는 낳은 정과 기른 정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벌어지고 있다. 권씨는 이미 국가보훈처로부터 신 상사의 군인사망보상금 2억원 중 1억원, 군인보험금 1억원 중 5000만원을 수령했다. 월 80만원씩 지급될 군인연금도 절반을 요구한다. 이에 신씨는 지난 6월 수원지방법원에 두 건의 소송을 냈다. 기여분 및 상속재산 분할 청구 소송과 양육비 청구 소송. 한 젊은이의 죽음 앞에서 두 인연의 값어치를 계산하는 일에는 민법의 여러 조항과 대법원 판례가 동원됐다.



기여분

지난달 25일 수원지법 심문실에서 정인철 변호사를 대동한 신씨가 권씨 측 류성하 변호사와 마주 앉았다. 두 소송 중 ‘기여분 소송’의 첫 만남. 재판부가 양측 입장을 듣고 사실 관계를 확인하는 자리여서 정식 법정이 아닌 심문실에서 진행됐다. 권씨는 불참했다. 판사의 질문은 “두 사람이 어떻게 헤어지게 됐나”였고, 양측 주장은 크게 엇갈렸다.

신씨 측 진술은 이랬다. “선준이가 두 살 때인 1983년 아내가 가출했다. 1년 뒤 갑자기 돌아와서는 이혼해 달라고 요구했다. 어쩔 수 없이 동의해줬다. 이혼하더라도 선준이와 딸 선영(당시 5세)이 얼굴이나 한번 보고 가라고 했는데 됐다면서 그냥 가버렸다. 그 뒤로 한 번도 애들을 찾아온 적 없고, 생사도 모르고 지냈다.”

권씨 측은 가출한 게 아니라 억울하게 쫓겨난 거라고 했다. “너무 가난했는데 남편에게서 상습 폭행까지 당했다. 남편은 딴 여자도 있었다. 애들에겐 안 간 게 아니라 남편 때문에 못 간 거다. 가슴에 한이 맺혀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당시 남편이 이혼하면 2000만원 지급되는 보험에 들어 있었다. 그 보험금을 남편이 챙겼다.”

이 자리는 20분이 채 안 돼 끝났다. 이후 양측은 재판부에 서면진술서를 수시로 제출하며 법리 공방을 벌여 왔다. 신씨 측 주장은 이렇게 요약된다. ‘신 상사를 아버지 혼자 키웠다. 어머니는 양육 과정에서 한 게 없는데 보상금을 50대 50으로 나누는 건 옳지 않다. 보상금을 나누더라도 아버지의 양육 기여도를 반영해 달라.’

신씨 측이 요구한 ‘기여분’은 100%다. 재판 전략에 따라 제시한 수치겠지만, 이 사건에서 ‘낳은 정’은 조금도 인정할 수 없으니 권씨가 받아간 보상금을 전부 다시 내놓으라는 뜻이다. 권씨 측은 이에 기여분 요구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기여분 주장은 민법 1008조 2항에 근거한다. 공동 상속인 중 상당기간 동거, 간호 등으로 피상속인을 부양하거나 재산 유지, 증가에 특별히 기여한 사람이 기여분만큼 더 많이 상속받게 한 규정이다. 예를 들어, 여러 자녀 중 한 명이 아버지를 모시고 살며 오랜 투병을 수발한 경우가 해당된다.

권씨 측 류 변호사는 “이혼한 부모 중 어느 한 쪽이 자식 키우는 건 당연한 의무이지 ‘특별한 기여’로 볼 수 없다. 두 사람은 협의이혼을 했고, 당시 아이들은 신씨가 키운다는 합의가 있었다”고 말했다. ‘기른 정’에 더 많은 점수를 주는 건 타당치 않다는 얘기다.

류 변호사는 “기여분 주장은 국가보훈처 보상금이 ‘상속재산’이란 전제가 있어야 성립되는데, 이 돈의 성격은 신 상사가 상속하는 재산이 아니라 유족에게 주어진 권리이며 유족에는 친모도 포함된다”고 덧붙였다.

양육비

양육비 소송은 다른 재판부에서 별개의 사건으로 진행되고 있다. 다음달 15일 첫 재판이 열린다. 신씨 측은, 이혼하더라도 양육비는 공동 책임인데 두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아버지가 혼자 부담했으니 이제라도 어머니 몫의 양육비를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낳기만 하고 길러주지 않았으니 친모로서 권리를 행사하려면 길러주지 못한 책임부터 지라는 주장.

신씨 측 정 변호사는 “요즘은 이혼 때 재판부가 양육비를 꼼꼼히 따져 분담시키지만 과거 이혼법정은 그렇지 않았다. 이혼 의사만 합치되면 양육비 협의가 없어도 이혼이 이뤄졌고 신씨와 권씨도 그랬다. 이런 경우 과거의 양육비도 청구할 수 있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다”고 했다.

권씨 측은 위자료도 못 받고 쫓겨나다시피 이혼했는데 이제 와서 무슨 양육비를 청구하느냐고 반문한다. 이혼 직후 권씨에게 실질적 재산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양육비 분담률을 따졌더라도 부담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혼할 때 신씨가 당시로선 거액의 보험금을 탄 게 있으니 양육비를 부담하는 건 당연했다는 논리도 내놨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보험감독원에 신씨의 보험금 수령 사실을 조회할 계획이다.

류 변호사는 “신씨 측에서 양육비를 3억6000만원이나 청구했다. 기여분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양육비 소송을 함께 제기한 것 같다”고 말했다. 상속·이혼 분야 변호사들은 기여분 소송에선 권씨 측이, 양육비 소송에선 신씨 측이 유리할 것으로 조심스럽게 예상했다.

원만한 타협점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양측 모두 법정에 오기까지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신씨는 “저쪽(권씨)에서 보상금 수령하려고 할 때 딸(선영)이 얘기해보겠다며 찾아갔는데, 너무 큰 상처를 입고 돌아왔다. 27년 만에 만나는 엄마에게서 따뜻한 말 한마디 기다렸을 텐데…. 매달 군인연금까지 타가겠다고 하는 마당이라 이젠 좋게 끝낼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류 변호사는 “권씨가 감정적으로 매우 격해 있다. 그동안 신씨 측 입을 통해 언론에 보도된 내용으로 자신이 너무 매도당했다, 파렴치범으로 몰렸다고 생각한다. 감정의 골이 너무 깊다. 권씨도 억울하고 응어리진 게 많다”고 전했다. 또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친모의 권리를 배제하고 성금을 신씨에게만 지급키로 한 것도 일방적인 여론에 밀려 내려진 결정인 듯하다. 권씨와 상의해 대응 방법을 찾아볼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기여분 소송은 양측 모두 준비한 서면을 다 제출했다. 재판부의 추가 자료 제출 요구가 없으면 남은 것은 선고다. 양측 입장이 바뀌지 않는다면 판결에 따라 다툼은 항소심이나 양육비 소송으로 옮겨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낳은 정’과 ‘기른 정’의 무게를 법의 잣대로 재야 하는 상황은 또 있다.

다른 천안함 희생자 고(故) 정범구 병장 어머니도 22년 만에 나타나 보상금을 수령해 간 전 남편을 상대로 이달 초 양육비 청구 소송을 냈다. 전 남편 거주지 관할 법원이 공교롭게도 수원지법이어서 신씨 사건을 담당한 재판부가 맡게 됐다. 기여분 소송도 검토 중이라고 한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