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김진홍] 빈곤에 대하여

입력 2010-09-15 17:35


“하루하루 연명해야 하는 貧者들을 위해 국가가 버팀목 역할 다해야”

빈곤 문제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인 모양이다. 요즘도 9억∼10억명이 하루 1달러 이하로 연명하고 있다. 지난 한 해에만 900만명 가까운 5세 미만의 영유아들이 숨졌다. 유엔식량농업기구는 영양실조 등으로 6초에 어린이 1명씩 목숨을 잃는 상태라고 전했다. 한쪽에서는 비만을 퇴치하자고 난리법석인데, 다른 쪽에서는 극도로 비참한 환경에서 배를 주려야 하는 부조리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 지구촌의 현주소다.

빈자들은 교육이나 문화 정보 등 숱한 영역에서도 배제되고 있다. 그래서 가난의 대물림을 끊기 어렵다.

빈자들은 대체로 체념 속에 살아간다. 하지만 이들이 앞으로도 침묵할 것으로 보는 시각은 적다. 빈곤이 자본주의의 구조적 병폐라는 인식이 꾸준히 확산되고 있어 폭발할 가능성이 상존한다는 얘기다. 빈부격차로 인한 갈등이 표면화될 경우 세계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현재의 자본주의가 연착륙하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부(富)의 양극화 해소가 꼽히는 이유다.

2000년 190여 개국 정상들이 유엔에서 전 세계의 빈곤 및 기아를 2015년까지 절반으로 줄이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한 MDGs(Millenium Development Goals:새천년 개발목표)에 합의한 것도 이 때문이다. ‘부자 나라’가 공적개발원조를 늘려 ‘가난한 나라’를 돕자는 방법도 구체적으로 제시됐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한 발 더 나아가 2008년 빈자를 배려하는 ‘창조적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강조했다.

올해 유엔은 10년 전 합의 내용의 이행상황을 점검한다. 그동안 다소 개선됐으나 5년 내에 ‘절반 감축’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는 난망이다. 많은 국가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공적개발원조 액수를 늘리지 않은 탓이다. 앞서 유엔은 1974년 가난한 나라를 돕자는 결정을 내렸지만 구두선에 그쳤던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빈곤문제와 이에 대한 정부의 대처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1997년의 경제위기 때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여 자본을 전면 개방했고, 노동시장 유연화 조치도 단행했다. 이를 통해 위기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자의 양산 등으로 최상위 소득계층과 최하위 소득계층 간 격차는 더 벌어졌다. ‘일하는데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른바 ‘신(新)빈곤층’도 증가했다.

여전히 썰렁한 윗목에 살지만, 빈자의 마음은 따뜻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최근 도매시장에서 만난 70대 할머니가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도 있다”며 다른 상인을 소개한 것, 그리고 할머니가 소개한 상인 또한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는 이야기는 가슴을 찡하게 한다. 비록 얼마 안 되는 유산이지만 사후에 이를 기부하기로 약속한 기초생활수급자들 얘기도 감동적이다.

이따금 불만을 표출하기도 한다. 용산참사가 하나의 사례다. 이들을 방치할 경우 사회통합마저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부의 대처는 미흡하기 짝이 없다. 사회복지 지출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를 다투고 있다.

공동체(Community)는 ‘서로(com) 선물(munus)을 나누는 관계’라 한다.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살아가는 게 아니라 마지못해 연명해야 하는 빈자들. 이들을 무시하지 말고, 소외시키지 말고, 업신여기지 말아야 공동체가 건강해질 것이다. 그 일에 국가가 앞장서야 한다. 한나라당 홍준표 최고위원이 언급한 대로 헌법에도 국가가 적정한 소득분배를 유지하기 위해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지 않은가. 빈자들에게 국가가 든든한 버팀목이라는 신뢰를 줘야 한다.

신뢰를 얻으려면 온기를 체감할 수 있는 정책들을 내놔야 한다. 다른 예산을 줄이고, 사회복지 지출을 대폭 늘리는 게 바람직하다. 가진 자들이 보기엔 불평등하더라도 부유세 신설 등 빈자들의 생활 개선을 위한 획기적인 조치들도 검토해볼 만하다. 빈자에 대한 배려가 ‘공정 사회’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김진홍 편집국 부국장 j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