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발 한발, 그림 속으로 들어 가는 길… 추석 연휴 걸어 볼만한 길

입력 2010-09-15 17:33


어릴 적 추억이 빛바랜 수채화처럼 아련한 고향의 길은 생각만해도 가슴이 설렌다. 소꿉친구들과 뛰어놀던 좁은 골목길, 산 넘고 내 건너 학교 가던 길…. 세월이 흘러 옛 모습은 아닐지라도 그 길에는 꿈과 사랑과 우정이 초가지붕 위의 박처럼 영글고 있었다. 어느 해보다 넉넉한 추석 연휴에 하루쯤 짬을 내 고향의 길을 걸어보면 어떨까. 굳이 고향의 길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모든 길은 고향으로 통하므로…. 추석연휴에 걸어볼 만한 길을 소개한다.

◇늠내길(경기 시흥)=제주에 올레길이 있다면 시흥에는 늠내길이 있다. 수도권 제1의 도보여행코스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늠내길은 지난해 10월 시흥시에서 조성한 길. ‘늠내’는 고구려시대 시흥의 옛 지명을 우리말로 풀이한 것으로 ‘뻗어나가는 땅’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제1코스인 숲길(14㎞)은 시흥시청 앞 도로 맞은편에서 출발해 군자봉, 진덕사, 선사유적공원을 거쳐 시청으로 되돌아오는 코스. 높지는 않지만 숲과 나무가 어우러진 산봉우리를 넘나들며 느림의 미학을 즐길 수 있다.

늠내길을 대표하는 갯벌길(16㎞)은 제2코스로 경기 유일의 ‘내만 갯골’을 끼고 양옆으로 넓게 펼쳐진 폐염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갯골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와 70년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소금창고가 갈대밭으로 변한 염전터에서 향수에 젖어 있다. 길이 평평해 자녀들과 함께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기에 좋다.

제3코스인 옛길(11㎞)은 옛 사연을 담고 있는 ‘하우고개’, ‘여우고개’, ‘계란마을’ 등이 있어 담소를 나누며 걷기에 적격이다. 하우고개는 산적이 뒤쫓아 급하게 피신하다 보니 숨이 턱까지 차올라 ‘하우하우’ 하게 되면서 붙여진 이름.

◇신성리갈대밭길(충남 서천)=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촬영지로 유명한 서천 한산면의 신성리 갈대밭은 폭 50∼200m, 길이 1.5㎞로 여의도공원의 2배. 순천만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갈대밭의 하나로 어른 키보다 큰 갈대 사이로 산책로와 나무 데크를 설치하고 곳곳에 시를 걸어 놓았다.

신성리갈대밭의 길은 갈대기행길, 영화테마길, 솟대소망길, 갈대문학길, 강변산책길, 갈대소리길, 갈대체험길, 재미있는길 등 약 2㎞. 강바람에 서걱거리는 갈대 소리를 들으며 길을 걷다보면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로 시작되는 신경림 시인의 시 ‘갈대’가 떠오른다.

신성리 갈대밭은 하루 중에도 느낌과 풍경이 사뭇 다르다. 이른 아침 햇빛에 여울지는 금강의 물결은 가슴을 벅차게 하고, 황혼 무렵 역광을 받아 하얗게 부서지는 갈대밭은 사색의 장으로 변한다. 그러나 비오는 날의 갈대밭만큼 서정적인 분위기가 묻어나는 곳도 드물다. 갈대밭과 금강, 그리고 비안개 자욱한 강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강둑에 서면 파도타기를 하는 갈대의 일렁거림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서천∼공주 고속도로 동서천나들목에서 신성리갈대밭까지 13㎞. 신성리갈대밭에서 금강둑을 따라 화양면 완포리까지 이어지는 6㎞의 둑길은 한쪽은 갈대밭과 금강, 한쪽은 황금색으로 물들기 시작한 들판과 아담한 마을들이 그림 같은 풍경을 그린다.

◇퇴계오솔길(경북 안동)=퇴계 이황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극찬한 퇴계오솔길은 안동 도산면의 단천교에서 시작된다. 퇴계는 13세 때 숙부인 송재 이우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위해 퇴계태실에서 청량정사가 위치한 청량산까지 낙동강변 50리 오솔길을 걸어 다녔다.

‘녀던 길’ 혹은 ‘시심의 길’로도 불리는 퇴계오솔길은 오랜 세월이 흐른 탓에 대부분 옛 모습을 잃었다. 하지만 백운지 전망대에서 학소대∼농암종택∼고산정으로 이어지는 강변길에는 500여년 전 퇴계가 다니던 옛길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그윽한 문향을 풍긴다.

호젓한 강변길을 달려 산허리를 감돌아 오르면 낙동강 상류의 풍경이 두루마리 산수화처럼 펼쳐지는 백운지 전망대가 나온다. 낙동강 상류의 절경은 면천에서 농암종택까지 1.4㎞ 구간에 꼭꼭 숨어있다. 학소대 수풀에서 빠져나와 강변 미루나무가 멋스런 오솔길을 걸으면 건지산 줄기와 청량산 줄기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퇴계오솔길 최고의 절경이 기다린다.

운해가 끊임없이 산줄기를 따라 피어오르는 배산임수의 아늑한 강마을에는 고풍스런 기와집 몇 채가 안동선비처럼 홀로 고고하다. 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는 마을이란 뜻의 가송리에 새 둥지를 튼 농암 이현보 선생의 유적지다.

◇낙안읍성 성곽길(전남 순천)=남도의 가을은 고향 어머니의 품만큼이나 넉넉하다. 그 중에서도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이 태동한 순천 낙안들판과 낙안읍성의 가을풍경은 남도에서도 아주 특별하다. 돌담 안 감나무는 저마다 가지가 휘도록 주렁주렁 가을을 달고 있고, 커다란 박은 해묵은 초가지붕에서 나날이 몸무게를 더하고 있다.

낙안읍성은 원래 토성으로 태조 6년(1369)에 이곳 출신 김빈길 장군이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으나, 낙안군수로 부임한 임경업 장군이 1626년에 석성으로 개축했다고 전해진다. 길이 1410m의 견고한 석성에 둘러싸인 낙안읍성은 시간이 정지된 고을.

동문과 서문을 연결하는 대로의 북쪽엔 동헌과 고을 수령의 숙소인 내아, 외부 손님을 맞던 객사, 향교 등이 위치하고 있다. 대로 남쪽엔 초가집과 대장간 장터 서당 우물 연자방앗간 텃밭 등 민초들의 삶의 터전이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 미로처럼 이어진다.

글·사진=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