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를 빻아 쌀을 만들고 나누고… 방앗간 3代 70년

입력 2010-09-15 17:42


“밥 알 하나 우습게보면 안 된데이. 여든여덟 번의 손길과 여섯 달을 지내야 쌀 한 톨이 나온다카이. 쌀이 목숨이제. 방깐(방앗간)은 나락을 빠 쌀을 맹글고 쌀은 아(자식)를 안 키우나.”

경북 예천에서 마전정미소를 운영하는 윤상태(65)씨는 군에 간 3년을 빼고 42년째 방앗간을 돌리고 있다. 그는 해방둥이다. 몇 해 전 그는 쌀가마를 옮기다 그만 앞으로 넘어졌다. 이때 애써 해 넣은 틀니가 망가져 앞니가 거의 없다. 무릎 관절도 닳고 닳았다. 간신히 걷지만 그렇다고 황급히 방아 찧으러 찾아오는 이웃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는다.

방앗간도 주인을 닮았다. 예천읍에서 28번 국도를 타고 선산·구미 방향으로 16㎞ 지점, 지보면 아래 장터 어귀에 구부정하게 서있다. 얼마 전 양철 지붕에 달렸던 간판이 돌풍에 날아간 뒤로 새로 달지 않았다. 세월의 먼지는 켜켜이 쌓여있다. 안채를 새로 지어 지금은 흔적이 없지만 1969년까지만 해도 정미소 옆에는 교회가 있었다. 정미소 안에 교회가 있던 사례는 유일할 것 같다. 마전정미소 집은 평소엔 말소리가 담을 넘지 않는 차분한 가정이다. 원동기 돌아가는 소리와 주일에 들리는 찬송가 소리 외엔 말이다.

윤씨가는 근대화시절 범국민운동으로 펼쳐진 산아제한 정책도 따르지 않았다. 이웃들도 ‘둘만 낳고 그만 낳자’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걱정 마그래이. 지가 멀 거는 가지고 나온다는 말 맞는 기라.”

부친 해원(88)옹 부부는 7남매를 낳았다. 아들은 부친보다 한 명을 더 낳아 8남매를 뒀다. 올해 27세 된 쌍둥이 아들 위로 누나가 6명이다.

“저러다가 또 지지바가 나오면 어쩔라고? 방깐집 미느리 참 안 됐대이.”

그러나 정작, 윤씨 어머니 김청자(87·지보교회 집사)씨와 며느리 엄명옥(60·권사)씨는 그냥 빙그레 미소를 지었을 뿐이었다.

“이왕이면 7공주가 안 낫겠심니꺼? 6공주 보담은. 또 누가 알겠는교. 떡두꺼비 같은 고추 쌍디를 주실지?”

늦복이 터졌다. 82년 80마력 원동기를 세우고 동력을 전력으로 바꾸던 해였다. 석기·정기 쌍둥이가 태어났다. 쌍둥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각각 삼성과 LG계열사에 근무하고 있다.

윤씨는 지금도 64년 그해 겨울을 잊을 수 없다. 대구 대륜고등학교 졸업반 때였다. 반에서 1, 2등을 놓치지 않았다. 입시를 앞두고 서울대 농대 원서를 쓰러 집으로 내려왔다.

“아부지요, 서울대 원서시더. 도장 좀 찍어 주이소.”

“왔으면 일 아하고 뭐하노? 퍼떡 군복(작업복)으로 갈아 입거라.”

부자의 기 싸움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하늘이 무너져도 한 번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번복이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날로부터 학업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70년 군 제대 후 돌아온 방앗간엔 온통 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다. 고모부와 공동으로 운영하던 정미소가 부도가 난 것이었다. 다행인 것은 땅이 부친의 소유라 기계 값만 지불하면 해결될 판이었다.

윤씨는 3년 동안 기계 값을 다 지불하겠다는 각서를 썼다. 남의 소유로 넘어 갈 위기를 간신히 면했다. 밤엔 농업관련 서적을 모조리 읽었다. 식량증대의 공신으로 불리는 통일벼가 나왔을 때 그의 실력은 입증됐다. 벼가 힘없이 쓰러지는 것을 막고 목도열병에도 잘 견디도록 처방한 것이다. 그런 그를 이웃들은 ‘농학박사’라 불렀다.

윤씨는 원 없이 살았지만 한두 가지 안타까운 일이 있다고 했다. 23년 전 고혈압으로 먼저 하늘나라로 간 동생 상영씨를 잊을 수 없다. 땅을 사도 꼭 절반을 나눠 가졌던 형제였다. 그런 동생을 보내고 제수씨의 농사와 4남매를 함께 뒷바라지 하고 있다.

또 한 가지는 조부와 부친이 사랑하던 정미소교회를 지키지 못한 것이다. 동아기독교회였다. 이 교회는 침례교 전도인이었던 윤씨의 조부 윤종우 전도인이 사돈들과 함께 세웠다. 윤씨의 가족들과 아래 장터 사람들이 이 교회를 다녔다. 교회를 책임지던 분이 세상을 떠나고 인근 동네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인도하러 오던 친척 감목(목사)마저 더 이상 올 수 없게 됐다. 혼자 주일학교를 맡아오던 윤씨의 동생 숙자(63·서울 화곡동 성암침례교회 권사)씨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식구들은 모두 침례교회 대신 대한예수교장로회 지보교회를 택했다.

하지만 윤씨의 부친은 교회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두문불출하기 시작했다. 별명이 ‘독일병정’ ‘호랑이 영감’으로 불릴 정도로 무서운 분이었다.

윤씨의 매제 정영광(57·지보교회 장로)씨는 “나락 한 알, 쌀 한 톨이 그냥 밖으로 흘러 다니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면서 “하지만 동네 사람들과 교회에는 쌀 아끼지 않을 만큼 인정이 후하셨다”고 말했다.

이 집에선 3대째 제사와 회갑, 칠순 등의 잔치란 없다. 결혼식 청첩장이 없는 것은 물론이다. 빚을 내 물건을 사거나 쓰는 것은 용납이 안 된다. 그러나 문턱을 넘어온 초대장엔 일일이 정성을 보낸다. 이웃집 초상이 나면 가장 먼저 문상을 하는 것도 이 집의 독특한 문화다.

70년대 중반까지도 정미소 마당은 일꾼과 식솔, 이웃 사람들의 한마당이었다. 일하는 사람이 10여명인데 밥 먹을 땐 40명이 넘었다. 아내가 부엌일을 하면 남편은 나무 아래 잡초라도 뽑을 만큼 부지런했다. 동네 아이들은 멍석 위에서 밥을 먹고 주일학교를 다녔다. 돌아갈 땐 쌀자루를 채워 줬다.

동네 사람들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먼저 정미소를 찾았다. 식량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가을에 벼로 갚겠다는 말만으로 쌀을 얻었다. 벼를 찧을 때 처음 벗겨지는 딩기(왕겨)는 땔감이 부족한 집안이 퍼갔다. 현미를 도정할 때 벗겨지는 당가루도 이웃집 소와 가축들의 차지였다.

당시 방앗간 집에서 가끔씩 끼니를 해결했던 집은 100가구 정도다. 이 중 너덧 집은 한 식구처럼 지냈다. 지금은 건축업을 하는 등 성공한 집안도 적잖다. 유년시절 방앗간 집 인근에 살았던 오관택(48·자영업)씨는 “탕탕탕 돌아가는 원동기 소리와 함께 주일마다 사탕을 얻어먹던 일이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윤씨는 올 추석 연휴 대목이 걱정된다. 퇴행성관절염이 심해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재작년부터 문 닫을 생각이었지만 ‘한 해만 더’ 하다가 여기까지 왔다. 윤씨는 요즘 부친의 눈치를 살핀다. 윤옹이 쌍둥이 손자 중 한 명에게 방앗간을 물려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미천니껴? 아들의 출셋길을 막았으면 그마(만)이지. 손자는 안 됩니더. 꿈도 꾸지 마이소 고마.”

윤씨는 나름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부친의 귀엔 들리지 않는다. 부친의 말이라면 한마디도 거역하지 않았다는 윤씨. 절대로 아들에게 대물림은 하지 않을 작정이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한걱정이다.

예천=글 윤중식·사진 서영희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