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누명으로 온두라스 연금중인 한지수씨 “나는 나가고 싶다!”
입력 2010-09-15 17:57
지난달 24일 오후 온두라스 산 페드로술라의 온두라스한인교회 2층 부엌에서 한지수(27·여)씨는 한참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표정이 밝았다. 불행을 겪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될 수 없을 정도였다. 한씨는 남색 티셔츠, 베이지색 치마 위에 앞치마를 덧대 입었다. 앞머리는 정성스럽게 올려 단정한 모습이었다.
“밥부터 드세요. 누가 만들었냐고 묻지는 마세요!”
맛있게 밥을 먹었다. 그는 흰 쌀밥을 젓가락으로 둥그렇게 만들어 김에 싸 먹었다. 한씨는 원래 김에 밥을 싸 먹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가 한국 음식을 먹게 된 것, 마음 편히 밥을 먹기 시작한 것은 불과 얼마 전부터였다.
설거지까지 마친 한씨는 부엌 옆 자신이 지내고 있는 단칸방에서 수첩과 공책, 연습장들을 주섬주섬 싸들고 나왔다. 대충 봐도 스무 권은 훌쩍 넘었다. 일기장이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20대 여성에게 갑자기 찾아온 고통과 아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렇게, 그동안 숨겨놨던 이야기를 하나하나 펼쳤다.
믿기지 않는 일
2009년 8월 27일. 이집트 카이로 국제공항. 한씨는 어깨에 가방을 둘러메고 오른손에 여권을 든 채 출국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씨가 몇 시간이 지난 뒤 도착한 곳은 엄마를 만나기로 한 뉴욕이 아니라 카이로의 감옥이었다.
“온두라스 댄(Dan) 사건 기억하는가?” 한씨는 자신이 온두라스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됐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카이로의 감옥을 ‘지옥으로 가는 정거장’으로 기억했다. 하나님을 믿지 않던 한씨의 입에서 저절로 “하나님, 나가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가 나왔다. 무섭고 떨렸다.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은 그를 더욱 낙담하게 했다. 수감된 지 2주 만에 찾아온 영사는 “문제가 생각보다 복잡해 온두라스에 직접 가야 할 것 같다”는 말을 전할 뿐이었다.
처음 만난 사람, 처음 느낀 평안함
한 달 뒤 한씨는 온두라스 로하탄경찰서 유치장으로 옮겨졌다.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다. “사건과 무관하다는 것만 밝히면 아무 문제 없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분명히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니니까요.”
9월 28일 한씨에 대한 2차 심리가 열렸다. 현지에서 고용한 변호사는 자신만만했다. 한씨는 “솔직히 짐까지 다 싸 놨었어요. 아빠에게 ‘우리 여기서 좀 놀다가 한국 들어가요’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기대가 상당했죠”라고 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이튿날 무너졌다. “나갈 수 없다”는 한마디.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아빠에게 너무 미안했어요. 부검의(剖檢醫)와 변호사 선임 비용. 딸로서 미안할 정도의 거액을 쓰게 했으니까요”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일주일 후 그는 라세이바 감옥으로 이감됐다. 본격적인 수감 생활이었다. 온두라스의 감옥은 열악했다. 한씨가 일기장에 그렸던 감옥 그림을 보니 얼마나 힘들었을지 알 수 있었다.
그나마 면회가 자유로웠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아버지 원우(57)씨는 일주일에 세 번 한씨를 찾았다. 그 이상은 면회가 안 됐다. 한씨는 “아빠가 오는 날만을 기다리며 살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아빠와 이야기를 하고 일기장에 글을 써내려가는 것만이 한씨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긍정적인 생각, 쉽지 않았다. 그의 안타까운 처지를 뒤늦게 안 온두라스 교민들이 과일과 김치, 라면을 싸들고 찾아왔지만 큰 위로가 되지 않았다. “처음엔 한국 사람들이 찾아오는 게 싫었어요. 감옥에 있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아는 양 말하는 게 싫었으니까요.”
부정적인 생각만 가득했던 11월 25일 감옥 안으로 키가 크고 우락부락한 외국 남성이 걸어 들어왔다(라세이바 감옥은 감방 안에서 면회가 가능하다). 그 사람은 한씨에게 뚜벅뚜벅 걸어와 자신을 소개했다. 한씨가 스쿠버다이빙을 배웠던 로하탄 지역의 목사 테리 블레이크였다. 그는 다짜고짜 성경말씀이 적힌 종이를 건네곤 “하나님이 보내서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한씨는 테리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내의 모함으로 4년 동안 감옥에 있었다, 악성종양이 생겨 고통스러웠다. 그 안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그리고 새 삶을 찾았다. 한씨는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해졌었다고 기억했다. “‘나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어서 날 이해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한번에 열렸어요.”
‘코쟁이’ 목사를 통해 한씨는 위로와 평화를 느꼈다. 테리가 떠난 뒤 그는 일기장에 글을 썼다.
“하나님은 계속 옆에서 날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 테리가 왔다. 테리의 방문으로 하나님이 뿌린 씨앗에 조금씩 다시 물을 주기 시작했다. 하나님과 대화하며 즐겁고 기쁜 마음을 누릴 수 있었으면…. 하나님 저 한국 보내주시면 교보문고 가서 성경책부터 살게요. 11.25”
한씨는 그날의 일기를 보여주며 일기 옆에 정성스레 그려 넣은 십자가를 손으로 짚었다.
우울증, 자살충동
2009년 12월 15일. 가석방 판결이 내려진 한씨는 승합차를 타고 온두라스한인교회에 도착했다.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그런데 교회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감옥에 있을 때보다 더 힘들었다. 감옥에서는 언젠가 나갈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오고 나니 온갖 불안감이 그를 억눌렀다. “사람들을 만나는 게 싫었어요. 유죄선고에 대한 공포, 부모에 대한 미안함, 그동안의 상처가 저를 짓누르기 시작했어요.”
마음의 상처는 우울증으로 발전했다.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자살’이라는 단어를 쳐 넣기도 했다. 테리를 만나 느꼈던 마음의 평안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는 결국 교회 내 체육관에 목을 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씨는 태어나 한번도 우울증에 사로잡힌 적이 없었다. 부족함 없이 자라 명문대에 다녔고 대기업에서 일했다. ‘거침없는 당당함!’ 그게 바로 한씨였다. 처음 겪는 마음의 병은 더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아빠에게 ‘죽어 버릴 거야’라고 소리쳤어요. 그땐 정말 죽어야 모든 게 끝나리라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하나님은 한씨가 그렇게 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지 않았다. 그동안 가만히 지켜보며 기도하던 온두라스한인교회 박명하 목사가 나섰다. 한씨에게 강제로 새벽기도를 시켰다. 한씨는 “그렇게 힘든데도 목사님 외모가 너무 멋있으시니 따라해 보고 싶었어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한씨는 태어나 처음으로 새벽제단을 쌓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한씨는 스파르타식 신앙훈련을 받았다. “좀 더 오래 기도해!” 박 목사는 질책했다. 성경책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호통이 싫어 억지로 읽었다. 그런데 한씨의 눈이 욥기에 다다르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라 주신지라”(욥 42:10)
그 구절을 읽은 한씨가 예배당 앞자리에 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최은심 사모가 한씨와 함께 성경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한씨는 “아마 그때부터 제 마음에 하나님이 제대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매일 새벽기도와 성경공부를 하며 마음을 다스리고 주께 한 걸음씩 나아갔어요”라고 말했다.
두 가지 소원
그런 한씨를 묵묵히 지켜보며 기도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아버지.
한씨는 지난해 12월 어느 날을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그는 감방 안에서 아빠와 싱글 매트리스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아버지 한씨는 자고 있는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뺨에 뽀뽀를 해주고 감방을 나섰다. 돌아누워 있던 한씨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땐 냄새난다고 싫어했는데… 얼마나 저를 사랑하는지 느껴져 많은 눈물을 흘렸어요,”
지난 4월 찬송가 한 곡도 몰랐던 한씨가 흰색 성가대 가운을 입고 부활절 칸타타 공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교회 맨 뒷자리에서 두 손을 모으고 바라보던 아버지의 두 눈에 이슬이 맺혔다.
공연을 앞둔 4월 3일. 한씨는 세례를 받았다. “다른 사람이 됐다는 생각에 너무나 기뻤어요. 상황은 달라진 게 없지만 마음에 기쁨이 찾아들었습니다.” 3일 후,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을 영접한 한씨의 입에서 방언까지 터져 나왔다.
한씨에겐 이제 두 가지 소망이 있다. 열심히 기도한 만큼 하루 빨리 누명을 벗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첫 번째 소원이다. 한씨는 “사건 이후 숨어 지내던 댄이 최근 호주에서 잡혔어요. 제 억울함이 빨리 풀렸으면 해요”라며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한씨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선진국에 비해 우리나라의 재외국민 보호는 매우 약한 수준입니다. 저와 같은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제 경험을 활용해 재외국민 보호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일조했으면 합니다.”
산 페드로술라(온두라스)=글 조국현·사진 김지훈 기자 joj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