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영성의 길
입력 2010-09-14 18:44
(11) 마음의 기도
진실한 기도는 언제나 마음의 기도이다. 기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내면적 관계요, 그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고 그것으로 자신이 당한 곤궁과 위기를 해결할 수단으로 여긴다. 그래서 좋은 기도는 응답받는 기도요, 그렇지 못한 기도는 나쁜 기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도 응답의 여부가 기도의 좋고 나쁨을 판단할 근거는 아니다. 기도를 효율성과 생산성의 기준으로 보는 것은 현대인의 마음에는 부합할지 몰라도 성경적 기도와는 부합하지 않는다. 성경적 기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의 성육신에서 시작한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육체 가운데 만나신 사건이다. 기도는 다른 말로 하면 우리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을 육체 가운데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기도 가운데 우리와 만나시기 원하고 그 현장은 육체로 표현된 우리 존재 전체이다.
기도는 곧 성육신의 내면화이다. 교부 아타나시우스(AD 296∼373)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처럼 되도록 하기 위해 인간이 되셨다.” 우리 가운데 육체로 오신 하나님은 우리를 육체 가운데 만나시기 원하신다. 그것이 기도이다. 따라서 기도는 근본에 있어 신비적이다. 이 말은 신비적으로 기도해야 한다거나 신비주의적인 기도가 가장 좋은 기도라는 말이 아니다. 기도 자체가 갖는 본질이 신비하다는 말이다. 기도는 그것이 시작되는 출발점에서부터 그것이 생성되고 만들어지는 과정까지 전적으로 신비에 속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는 것도 신비하고 우리가 하나님에게 가는 것도 신비하다. 그래서 기도의 신비성에 눈뜬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겸손할 수밖에 없다.
14세기 ‘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을 쓴 저자는 하나님의 신비를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 관해 생각할 수 있을까? 하나님은 누구일까? 우리가 아는 대답은 우리는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우리가 다른 피조물, 하나님의 사역, 우리의 모든 것들에 대해 오직 은혜를 통해서만 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사고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안다. 기도를 배우는 것도 지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사랑을 통해서 배운다. 사고는 증명을 요구하나 사랑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기도는 본질적으로 마음의 일이다.” 기도를 신비한 마음의 작용으로 이해한 이런 종류의 기도는 사막교부들의 기도에서 자주 발견된다.
이집트의 수도사 마카리우스(300∼390)가 어느 날 제자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아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두 손을 펴고 ‘주님, 당신이 아시오니 당신의 뜻대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라. 그것도 어려워지면 ‘주님, 도와 주소서’라고 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 마음의 기도는 긴 말이 필요 없는 기도이다. 자신을 진솔하게 쏟아내기만 하면 된다.
마음의 기도는 기도하는 동안 기도하는 자기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기도다. 온전히 하나님께만 몰입하여 마음 깊은 데서 하나님을 느끼고 그와 만나는 내면적 기도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기도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기도다.
이윤재 목사 (한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