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송기원의 가을 “나는 거지가 되고 싶소이다”

입력 2010-09-14 21:29


지인의 부고를 접하고 장례식장으로 향해 걷는 길에 노란 호박꽃이 벙글고 있었다. 지금은 서민 주거지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주공 아파트의 담벼락을 따라 걷는 길에서 죽음과 호박꽃의 상관관계를 떠올리게 된 것은 순전히 부고 덕분이었다.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고 우산 없이 걷는 동안 비가 죽음을 적시지 못한다는 하나의 자명한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그러고보니 호박꽃은 삶의 꽃이 아니라 죽음의 꽃이었다. 죽었던 것이 다시 피어…. 시절은 어디로 간 것일까. 요즘은 시절도 몸피를 벗어버려 눈에 보이지 않는다.

장례식장에 다녀온 다음날인 지난 11일 새벽에 강원도 인제군 만해마을로 떠났다. 최근 죽음을 주제로 한 시집 ‘저녁’(실천문학사)을 펴낸 시인이자 소설가 송기원(63)이 그곳에 2개월 일정으로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1974년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각각 시와 소설이 동시 당선된 그가 이번 시집을 ‘마지막’이라고 선언해 버렸다는 소문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행선지로 이동하면서 읽은 시집에서 그는 죽음의 편, 죽음의 영토에 가깝게 서 있었다. ‘죽음을 힘들어하는 너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는 시집 첫 쪽의 짧은 글이 아프게 다가왔다. ‘너’는 우리 모두이자 그 자신을 지칭한 것이리라.

“옥양목 속치마가 빨랫줄에서/하얗게 바래고 있네./누가 아꼈다가 꺼낸 기다림일까./내 마지막 남은 살점이 거기에 달라붙어/오래전의 희미한 무늬가 되네./자세히 보니, 연한 분홍빛의/모란꽃으로 활짝 피고 있군./내 살점의 마지막 유용이라면/몇 도만 더 조도(照度)가 밝아도 좋을 걸./그렇게 이승에서의 살냄새도/몇 도만 더 뚝뚝, 모란꽃에 스며들 걸./누군가의 기다림을, 내가 아닌/살아 있는 사람도 알아볼 수 있게.”<‘유용(有用)’>

죽은 내가 살아있는 사람에게 띄우는 ‘유용’이다. 송기원은 다 벗어버리고 싶은 것이다. 다 지워버리고 싶은 것이다.

강원도뿐만 아니라 중부지방 전역에 세찬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흘 내리 쏟아부은 가을비에 여름을 달구었던 뻐꾸기 울음도 들리지 않았다. 내린천은 물이 상류에서 하류로만 흐른다는 중력의 법칙을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내린천과 가을비와 아름드리 소나무에 둘러싸인 문인의 집, 2층 다실에 그가 들어선 것은 오전 10시쯤이었다. 그의 외관이 되어버린 중절모도 없이 허허로운 머리에 그만큼 허허로운 얼굴이었다. 수인사를 한 뒤 읽고 있던 시를 마저 읽었다.

“바람이 불면, 문득 무게가 그리워지네/나도 한때는 확실한 무게를 지니고/바람이 부는 언덕에서/한껏 부푼 부피도 느끼며/군청색 셔츠를 펄럭였지/마치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그렇게/누군가의 안에서 언제까지라도/지워지지 않을 것처럼”(‘무게’)

마지막 연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은 ‘지워지고 말았다’의 반어적 비유다. 인연은 사는 동안 무수히 지워지고 지워진다.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면면히 흐르는 모정도, 아니 애초에 어머니 가슴이란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어제는 속초로 넘어가서 장치찜을 먹고 왔지. 오래전에 주문진에서 먹어봤는데 속초 먹자거리에 가니까 장치찜이 있더군. 그러고보니 내가 1971년에 용대리에서 머문 적이 있어. 그땐 1시간에 버스 한 대만 지나다니는 비포장 도로였는데. 시인이란 존재는 이쁜 것을 먼저 봐버린 죄인인 것이지. 요즘 난 완전히 고아가 됐어. 스스로 고아가 된 것인데. 내가 아내에게 그랬어. 올해부터는 어머니 제사도 지내지 말자고 말이야. 어머니 제사를 내려놓으니까 아주 편해. 마지막 남은 실을 끊어버리자고 작심을 한 것이야. 제사를 내려놓으니까 독한 마음이 생기더라니까.”

머니 제사를 내려놓는 심정이었을까. 시집엔 그가 예전에 단 한번도 언급하지 않은 어머니와 누님이 나와 있다. “어릴 적 누님을 부둥켜안고 울면서 듣던 밤바람 소리 속에는 멀리 웃녘으로 겨울 장사를 떠난 어머니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습니다.”(‘밤바람 소리’ 첫 연)

아버지 얼굴을 모르고 자란 그에게 어머니라는 존재에 비교할 대상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 그가 어머니 제사를 내려놓다니. “지렁이건 사람이건 죽기는 마찬가지인데 왜 사람만 제사를 지내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아. 그래서 내려놓은 것이야.”

그는 천안에 마련해 두었던 작업실을 최근에 없애버렸다고 했다. “하나씩 지워나가야지. 작업실 전세금은 마누라에게 줘버렸어. 만해마을에서 가을을 나면 겨울은 담양에 있는 ‘글을 낳는 집’에 들어갈까 해. 아무 데면 어때. 집을 없애버리니까 그게 그리 편해. 늘그막에 집을 짓고 들어 앉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는데 그게 소용이 없는 것이지.”

점심 먹을 시간이 됐으므로 인근 식당으로 이동해 두부찌개를 시켰다. 집에서 만든 모 두부를 큼지막하게 썰어놓고 고추장 양념을 해 끓여대는 동안 그는 입맛을 다셨다. “어르신, 여기 소주 한 병 주세요.” ‘맛’하면 송기원을 따라갈 자가 몇 되지 않는다. 유명한 밥집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맛집 기행을 신문에 연재했을 만큼 그는 식도락가이자 대식가다. 입맛을 쩝쩝 다시던 그는 대뜸 “나는 거지가 되고 싶어. 그게 마지막 가는 길이지”라고 말함으로써 그날의 대화는 ‘거지’로 모아지고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젊었을 때 6개월 정도 거지생활을 해본 적이 있어. 오후 1시나 2시쯤 식당에 가 동냥을 하면 어김없이 밥을 주는데 운이 좋으면 손님들이 남기고 간 걸 모아서 술도 한 병 챙길 수 있어. 여름엔 거지로 살고 겨울이면 ‘시설’에 들어가면 돼. 봄 되면 다시 나와서 싸목싸목 돌아다니면 되는 거야. 이보게 거지가 제일 행복한 거야. 거지는 왕이나 마찬가지야. 인도에 가면 임서기(林捿期)란 게 있지. 수풀에서 살 나이라는 뜻인데. 태어나 25세까지는 학습기. 50세까지는 가주기(家住期), 즉 결혼해 가족을 돌보며 생산활동을 하는 나이이고 다음 75세까지가 임서기(林棲期)야. 집을 떠나 성전을 공부하는 시기지. 거지생활이란 말이야. 자네는 몇 살인가. 오십이라고? 인도에서는 쉰 살의 나이를 ‘바나 플러스’라고 해. 산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때라는 뜻이지. 오십 년의 인생을 살았으면 이제 서서히 산으로 떠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거야. 난 임서기이니까 산으로 들어가 동굴이나 하나 차지하고 죽어가면 되는 것이야.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않으니까 죽었는지 살았는지 가족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지.”

두부찌개가 끓자 그는 국자로 큼직한 두부 한 덩어리와 국물을 떠주었다. 식성 좋은 그는 말을 하면서 계속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식성이야말로 거지의 미덕 제 1호가 아닌가. 배가 불러오는 기색도 없이 한참동안 식탐을 즐기더니 한 마디 툭 던졌다. “내 신조가 하나 있어. 살아생전에 좋은 일 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이야. 남이 고마움을 느끼는 게 내 마음에 남아 있으면 그게 고약해지는 것이야. 대신 남이 내게 고약한 마음을 갖는 것은 괜찮아.”

에게 도움도 안 받고 그 자신이 남에게 도움도 주지 않는 이상한 신조는 그가 요즘 허허실실 떠돌며 붙들고 있는 마음 공부의 한 축이기도 할 것이다. 남이 고마움을 느끼면 그 고마움의 마음 때문에 다시 마음의 빚이 생기고 마니, 그는 이제 인연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를 누군가에게 빼앗긴 것 같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했어. 정작 외로움을 모르는 나이인데 몸으로 외로움을 알아버렸던 거야. 이제야 왜 내가 외로움을 못 견뎠는지 알 것 같아. 난 외로워하는 마음을 종결짓고 싶은 거야. 요즘은 간혹 외로움에 대한 견딤이 생기니까 엄살 부리는 재미가 있어.”

말이 엄살이지, 그는 시대의 굽이굽이마다 영어의 몸이 될 정도로 엄살끼가 없는 사람이다. 1975년엔 ‘대학인의 선언’ 발표 땜에, 1980년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1985년엔 무크지 ‘민중교육’ 필화사건으로, 1990년엔 오봉옥 시인의 장시집 ‘검은 산 붉은 피’를 발간해 다시 구속되었으니 4차례에 걸친 징역살이가 근 5년에 이른다. 그런데도 독기가 도통 보이지 않는다. 그냥 순진한 소년 같다. 그런 그를 일찍이 알아본 사람이 김동리다. 중앙대 문예창작과 재학시절 은사였던 김동리는 “얄팍한 글재주 하나만 앞세운 채 천방지축 날뛰다 처자식 굶겨 죽일 놈”이라고 수업시간 내내 송기원만 꾸짖다가 나간 적도 있었고, 심지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송기원이라는 사람이 차 마시거나 밥 먹자고 접근하면 절대 응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기도 했다. 스승은 비범한 재능을 가진 제자의 방종을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그는 퇴폐의 대명사였다. 그런 그가 이제 마지막 시집을 상재한 뒤 다시 마지막 소설이라고 스스로 명명한 작품을 쓰기 위해 강원도 인제군에 들어 있다.

그는 마지막 소설을 탈고하면 곧장 거지로 나설 작정이다. 거지가 돼서 자기 삶의 왕이 되고 싶은 것이다. 내년 이맘 때, 빡빡머리에 앞이마가 툭 불거진 그가 초라한 행색의 거지꼴을 하고 나타나면 그건 그가 제대로 임서기에 들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인제=글·사진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