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손수호] 예전에 살던 동네에 가보니

입력 2010-09-13 17:45


아이들이 성장하면 도무지 휴가가 절박하지 않다. 지금껏 휴가철 프로그램이 아이들 위주로 짜였기에 그들이 제 스케줄을 가지니 시간을 꾸리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이다. 내외간에 오붓하게 휴가를 즐기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아직 익숙지 않고 쑥스럽다.

휴가 기간에 옛날 동네에 가보기로 한 것은 그런 고심의 산물이었다. 아내도 기꺼이 동의했다. 나이도 그렇거니와, 아이들을 성년으로 키워놓은 시점에서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싶었다. 20대 후반부터 고군분투하며 살아온 서울 옛 동네는 고향과 타향의 중간쯤에 자리하고 있었다.

구로구 개봉동. 구로구는 1988년만 해도 중심부에 진입하지 못한 주변인들의 거처였고, 개봉동은 그중에서도 목감천 하나로 광명시와 구획되는 서울의 끝자락이었다. 그곳 연탄 때는 13평 주공아파트에서 아이 둘 낳으며 30대를 보냈다. 주민들끼리는 얼굴만 봐도 반가워 서로의 집을 들락거렸다.

떠도는 도회인의 슬픈 초상

22년 세월을 건너 다시 찾은 개봉동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개봉역을 중심으로 아파트가 빼곡했고, 내가 살던 주공아파트는 유명 건설회사가 지은 고층아파트로 바뀌어 있었다. 꼬마들이 세발자전거를 타던 골목길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었다. 나오는 길에 아이가 다니던 유치원에 가보니, 이게 얼마나 고마운지, 약간의 손질만 한 채 교회로 쓰이고 있었다. 햇살도 피할 겸 제과점에 들러 팥빙수 한 그릇을 먹고 나왔다. 예상은 했지만 개봉동은 쓸쓸한 타향이었다.

다음날 찾은 곳은 은평구 신사동. 카드 빚을 돌려 막으며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한 곳이다. 아파트는 언덕 위에 자리해 조용하고, 전망 좋고, 공기도 맑았다. 아이들은 비가 와도 떠내려갈 일이 없다고 좋아했다. 여기서 15년 살면서 아이들이 초중고를 나왔으니 걔네들에게 고향이 있다면 그런 정서를 낳기에 충분한 곳이다.

4년 만에 가본 신사동은 여전했다. 산이 깎일 리 없으니 전망이나 공기는 아직도 좋았다. 산길에는 가로등이 놓여 다니기에 편했고, 자주 말썽을 일으키던 엘리베이터는 새것으로 교체돼 쾌적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집값 때문에 걱정이다. 호재가 이어져도 부동산 가치는 변하지 않았다. 남아 있는 이웃들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신사동을 내려오면서 생각한 것은 떠도는 도시적 삶의 비극이다. “한국은 지나치게 물질중심적이고 사회적 관계의 질도 낮아 행복하지 않다”는 심리학자 에드 디너 교수의 지적이 떠올랐다. 물질의 사다리 꼭대기에 있다 보니 내면의 즐거움, 긍정적 정서 등 행복의 요소는 안중에 없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집과 땅이 삶의 소중한 거처여야 하는데도 도시인들은 끊임없는 상승 욕구에 사로잡혀 현재적 삶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 동네는 저 동네로 가기 위한 정거장이고, 33평 아파트는 40평으로 가기 위한 중간기착지에 불과하니 이웃은 곧 헤어져야 할 대상으로 머문다.

나이 든 사람들은 돌아가지도 않을, 돌아갈 수도 없는 고향 생각에 뿌리내기길 꺼린다. 스스로를 밀어내면서도 도시가 자신을 밀어낸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소외시키며 도시적 삶에 임시성과 일회성을 집단적으로 부여하니 생활은 닻을 내리지 않고 부평초처럼 떠다닌다. 이렇게 되면 돈이 아무리 많아도 행복해지지 않는다.

삶의 터전 소중히 여겨야

추석이 다가온다. 사람들은 기를 쓰고 고향을 찾을 것이다. 기실 농촌은 빈껍데기인데도 옷을 차려입고 내려간다. 그런 귀성은 모순이다.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땅은 배척하면서 고향만 좋다고? 서울이든, 어디든 자신의 일상적 삶이 유지되고 존중되는 곳을 사랑해야 한다. 후대를 생각해서도 그렇다. 인구의 절반이 사는 수도권 주민들이 삶의 터전에 뿌리내리지 못하면 공동체의 근원적 정서가 흔들일 수 있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