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엄마 원망하던 아이 1박2일 함께 보내며 마음 열어
입력 2010-09-12 21:24
서울가정법원 ‘이혼가정 자녀문제 솔루션’
아홉 살 수지(가명·여)에게 엄마는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대상이었다. 3년 전 울며 쫓아가는 자신을 뒤돌아보지 않고 매몰차게 떠나버린 아픔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지난해 갑자기 보고 싶다는 연락을 해 왔다. 이혼 소송이 진행 중인 법원을 통해 면접교섭권을 요구했다. 하지만 수지는 이제 와서 자신을 찾는 엄마를 보고 싶지 않다며 거부했다. 법원에서 만난 엄마가 울 때도 수지는 엄마를 제대로 쳐다보지 않은 채 “잘못을 해 놓고 왜 우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수지가 마음을 바꾼 것은 서울가정법원이 마련한 상담 프로그램을 소화한 뒤 엄마와의 면담을 갖게 되면서부터다. 수지는 “엄마는 왜 나를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어요”라고 물었고 엄마는 “뒤돌아보면 갈 수 없을 것 같아 그랬다”며 미안하다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이후 수지와 엄마는 법원과 서울시 건강가정지원센터가 진행한 캠프에서 1박2일을 보내며 마음을 터놓게 됐다. 하고 싶었던 엄마의 말을 담은 편지를 받고 손수 발을 씻어주는 엄마를 보면서 얼어붙었던 수지의 마음도 조금씩 녹아내렸다.
서울가정법원이 올해 도입한 ‘이혼가정 자녀문제 솔루션’ 프로그램이 조금씩 성과를 거두고 있다. 솔루션 프로그램은 가정법원 판사와 조사관, 자문위원들이 부모의 이혼 과정에서 상처를 입은 자녀들을 돕기 위해 만든 상담 프로그램이다. 재판 과정에서 담당 재판부는 이 프로그램의 필요 여부를 검토해 당사자에게 권고한다. 당사자들이 동의하면 상담을 시작한다. 비양육자 부모(이혼으로 떨어져 살게 된 아빠 또는 엄마)와 자녀들은 상담과 놀이치료 등을 받으며 판결 이전에 면접교섭권 인정과 같은 조정을 시도한다.
올해 솔루션 프로그램에 회부된 20건 가운데 조정이 진행 중이거나 조정으로 끝난 케이스는 10건이다. 조정이 이뤄지지 못하고 다시 재판 절차로 넘어간 나머지 10건에도 솔루션 프로그램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다. 서울가정법원 관계자는 12일 “과거에는 재판부가 양측 의견만 듣고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면 끝이었지만 프로그램이 도입되면서 법원이 이혼 가정의 상처를 치유하는 후견적 기능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혼 소송에 이 프로그램을 다 적용하기 위해선 넘어야 할 산도 많다. 한 해 접수되는 이혼 소송 건수가 12만 건이 넘는 반면 서울가정법원 외 다른 법원에는 판사와 상담위원 등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법원 관계자는 “부모가 이혼하더라도 비양육자 부모와 안정적인 관계를 갖는 것은 아이의 성장과 발달에 매우 중요하다”며 “앞으로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과 외부 상담기관과의 네트워크 확대를 위해 더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의근 기자 pr4p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