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32) 태풍 매미가 선물한 신석기 배

입력 2010-09-12 17:38


태풍의 계절입니다. 이달 초 강타한 제8호 ‘곤파스’가 충남 서산 개심사 대웅전(보물 143호)을 훼손하는 등 태풍은 문화재 관리에 반갑지 않은 손님이지요. 그러나 태풍이 선물한 문화유산도 있습니다. 2003년 9월 태풍 ‘매미’가 한반도를 강타할 당시 경남 창녕군 비봉리에서는 양수장 건설 공사가 진행 중이었답니다. 공사장은 침수되고 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조개무지가 드러났습니다. 비봉리 신석기시대 유적지 발굴의 서막을 연 것이죠.

이듬해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실시돼 8000년 전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먹다 남긴 음식물과 배설물은 물론이고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배 2척을 수습하는 성과를 거두었답니다. 유적지 최하층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통나무 배(사진 위)는 최대 길이 310㎝, 최대 폭 60㎝, 깊이 약 20㎝로 가운데를 잘랐을 때 U자형을 나타내는 이른바 환목선(丸木船)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배를 제작하는 데 쓰인 나무는 소나무로 밝혀졌고요.

배를 면밀히 살펴보니 철기나 청동기 같은 금속기가 발명되지 않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치밀하게 가공한 흔적이 역력했다는 것입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통나무를 군데군데 불에 태운 다음 돌자귀 같은 날카로운 석기를 이용해 깎아내고 다시 갈돌과 같은 기구로 표면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배를 건조했다는 사실도 드러났지요. 이를 증명하듯 선박 곳곳에는 불에 그을려 가공한 흔적인 초흔(焦痕)이 발견됐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이전 선박 실물은 경주 안압지 출토 통일신라시대 배(8세기), 전남 완도와 전북 군산 십이동파도에서 각각 인양한 선박(11세기), 전남 신안 안좌도에서 발견한 배(13∼14세기), 목포 달리도에서 찾아낸 선박(14세기)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역사시대 유물인 반면 비봉리 배는 선사시대 것이라는 점과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선박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답니다.

특히 비봉리 선박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배로 알려진 도리하마(鳥浜) 1호나 이키리키(伊木力) 유적 출토품보다 무려 2000년 이상 앞선다는 점에서 태풍 ‘매미’가 얼마나 큰 선물을 주고 갔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얼마 전에는 이 배를 젓는 도구 중 하나인 노(櫓·사진 아래)가 발견돼 관심을 모았지요. 노는 전체 길이 181㎝로 자루(66㎝)와 물갈퀴(115㎝)가 거의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어 신석기시대 선박연구에 귀중한 자료랍니다.

태풍이 불러낸 문화유산은 또 있습니다. 1925년 여름, 필리핀 부근 해상에서 발생한 태풍이 한반도를 덮쳐 한강 일대 중부지역엔 대홍수가 났습니다. 한반도에도 신석기시대가 있었음을 알린 서울 암사동 유적은 당시 태풍으로 흔적을 드러냈지요. 이는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조차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고 포기해버린 백제의 초기 도읍지 하남 위례성(풍납토성) 발굴로 이어졌습니다. 재앙과 더불어 유물도 선물하는 태풍. 어떻게 대비하느냐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것 같습니다.

문화과학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