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곤파스 피해 ‘104마을’ 사랑의 지붕 씌우기… 비 젖은 달동네 지붕마다 ‘파란 희망’

입력 2010-09-10 17:41


시간여행을 온 것일까? ‘7080세대’의 향수를 위해 재현해 놓은 테마파크에 온 것일까? 오르막 양쪽으로 허름한 집들이 다닥다닥 늘어선 시멘트 길을 걸어가자니 묘한 위화감이 든다. 판잣집, 달동네…. 누군가에게는 어려웠지만 그립기도 한 과거로 기억될 공간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직도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힘겨운 삶의 현장이다. 그것도 무허가 임시 거주지가 아니라 엄연히 집집마다 주소가 부여돼 있는 합법적 거주지로서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104마을’이라고 불리는 노원구 중계동 산104번지가 그곳이다. 태풍 ‘곤파스’가 아침 일찍 서울을 할퀴고 빠져나간 지난 2일 오후, 구름 사이로 잠깐 햇볕이 내려오자 동네 중간쯤 위치한 어느 집 지붕 위에서 눈이 부시게 파란 빛이 반사됐다.

“여기 끈 좀 자르게 가위 좀 줘 봐요, 가위!” “어어, 거기 조심해. 잘못하면 발이 빠진다고.” 서너 명의 남자들이 지붕 위에 올라가 텐트용 파란 방수천을 펼치고 있다. 그렇게 크지도 않은 천인데 워낙 집이 작다 보니 뚜껑을 덮듯 폭 감쌀 수 있었다. 노끈으로 천을 단단히 고정한 뒤에는 폐타이어를 올려 여기저기 고이는 작업이 이어졌다. 밥상공동체 산하 서울연탄은행과 중계본동 주민자치센터가 진행 중인 ‘사랑의 지붕 씌우기’ 사업의 첫날 모습이다.

이 동네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서울연탄은행은 주민자치센터의 제안을 받고 이번 사업을 기획했다. 재개발이 예정돼 있긴 하지만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대부분 집주인은 떠나고 세입자들만 남아 있다 보니 아무리 집이 노후하고 파손돼도 보수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이 동네에 ‘응급처치’라도 해 주자는 제안이었다. 마치 상처에 붕대를 감듯, 지붕이 거의 파손 지경에 이른 집들부터 골라 방수천을 씌우기로 했다. 여기에 든 물품은 500여만원어치로 광동제약에서 후원했다. 인력은 밥상공동체를 후원하는 몇몇 기업 근무자들과 지역 주민들이 자원봉사로 채웠다.

골목 건너편에 서서 이 작업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이 집 주인 김모(53)씨다. 러닝셔츠에 반바지, 슬리퍼 차림의 김씨는 깡마른 몸과 파리한 낯빛에 병색이 완연한데 이 집에서 혼자 살고 있다.

놀라운 것은 초등학생이었던 1970년도부터 한 번도 이 집을 떠난 적 없이 살아 왔다는 것이다.

“저희 부모님이 이 집을 지으셨어요. 여덟 평씩 불하를 받아 처음에는 천막 치고 살다가 어렵게 지으신 집이죠. 3년 정도는 산에서 나무 해다가 불 때고 밀가루 배급받아가면서 살았어요.”

그야말로 황석영의 ‘강남몽’ 속 장면 그대로다. 그나마 소설 속 가난한 주인공들은 ‘자가 거주자’였지만 김씨는 가게를 운영하다 진 빚으로 소유권마저 잃은 세입자 신세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아내가 이혼해 떠나고, 아들이 출가할 때까지 그저 ‘여기가 내가 살 곳이려니’ 하고 살아 왔다는 김씨는 이제는 이 집이 어서 헐리기만 기다리고 있다. 그래야 적은 보상금이나마 받아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이번처럼 태풍이라도 오면 그저 막막할 따름이다. “밤새 잠을 한숨도 못 잤어요. 비가 새는 데마다 물을 받아서 바로바로 내버리지 않으면 가재도구가 전부 물에 잠기니까요.”

그렇게 밤을 꼬박 샜지만 거센 비바람으로 종내 집 한쪽의 슬레이트 지붕에 큰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망연자실한 채로 한숨을 내쉬던 차에 때마침 나타난 ‘지붕 씌우기’ 팀은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지붕이 씌워지는 과정을 바라보면서 김씨의 얼굴에는 조금씩 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자원봉사자로 지붕 위에 올라가 있다 내려온 한동운 중계본동 동장은 “이 좁은 지역에 1000여 가구가 밀집해 살아가는데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나 어린이들도 적지 않다”면서 “아무리 개발을 앞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단 하루라 해도 안전하게 살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집이 너무나 많다”고 개탄했다. 특히 성인들이 일하러 이 지역 밖으로 나가 있는 낮 시간에 집이 무너지거나 폭우가 올 경우가 문제라고 걱정했다.

역시 작업에 동참하고 있는 밥상공동체 대표 허기복 목사는 “적은 비용으로 급하게나마 일을 시작했는데 막상 와 보니 도움이 시급한 집이 너무나 많다”고 말했다. 허 목사는 연탄은행 사무실에 이 지역 어린이들을 위한 도서관과 공부방을 개설하고 재정 상담과 노약자를 위한 건강검진 등 사업도 진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또 “긴급한 주거환경 개선, 영세 세입자 이주 등 근본 대책 마련에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붕 씌우기 사업은 당초 10여 가구를 대상으로 1주일간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요청이 많아 대상 가구를 한정하지 않고 추석 전까지 계속할 예정이다.

다시 하늘이 꾸물꾸물해지는 오후, 104마을을 걸어 나오는데 동네 어귀 전봇대에 붙은, 쓰레기 무단 투기 금지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얄궂게도 ‘살기 좋은 도시 1위 노원, 이곳은 아름다운 곳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