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용의 공간 너머] 유취만년 (遺臭萬年)
입력 2010-09-09 17:54
“황희의 아들 남원군 황수신이 죽었다. 여러 벼슬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는데, 사람됨이 뼈대가 웅위(雄偉)하고 성품이 관대하며 자질이 풍부하여 재상(宰相)이 될 만한 그릇이었다. 경사(經史)를 조금 섭렵했고, 관리로서의 능력에는 장점이 있었다. 정승이 되어서는 대체(大體)를 유지하는 데 힘을 기울여 때에 따라 태도를 바꾸며 세태에 영합했다. 여러 대에 걸쳐 벼슬을 했으나, 큰 업적은 남기지 못했다. 뇌물이 폭주하여 한 이랑의 밭을 탐하고 한 구(口)의 노비 때문에 다퉜으니, 여러 차례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다. 사람들이 그를 일러 말하기를 ‘성은 황이요, 마음도 황(黃)이다’라 했다.”(‘세조실록’ 42권, 세조 13년 5월 21일)
세종대왕의 명신(名臣)이자 청백리였던 황희의 아들로 그 역시 영의정까지 올랐던 황수신의 일생에 대한 사관의 총평이다. 비록 살아서는 2대에 걸쳐 재상이 되는 ‘가문의 영광’을 누렸지만, 죽은 뒤 역사적 평가는 냉혹했다.
누군들 재산에 욕심이 없겠는가마는, 권력을 가진 공직자가 재산을 탐하면 반드시 불공정한 짓을 저지르게 마련이다. 농사꾼이나 장사꾼의 축재가 노력과 신용, 때로는 운의 대가인데 반해 공직자의 축재는 주로 ‘부정(不正)’의 결과다. 보통 사람들은 돈을 좇아 움직이지만, 권력을 지닌 공직자는 돈이 따라다니는 사람이다. 청렴한 사람도 거부하기 어려운 게 뇌물인데, 탐욕스러운 사람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래서 조선시대 사람들은 욕심 많은 사람은 고관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고, 탐관오리를 특히 경멸하고 증오했다. 그런 문화에서 “황노랭이”라는 별명이 붙었으니 ‘2대 정승’이라는 명예가 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출세에 눈이 먼 부대장이 헌병참모나 특무대 같은 권력기관을 시켜 얼굴이 반듯하고 싱싱한 젊은 여인을 골라 높은 사람에게 상납하는데 성병(性病) 보균자는 절대 금물이라고 한다. 많은 돈을 들이지 않아도 가장 환심 사는 비결이라니 역시 출세하는 사람은 남달리 영특한가 보다. 특히 직속상관 관등성명의 맨 상위에 자리하는 높은 분이 일선 시찰차 전방에 오면, 그분이 가장 좋아한다는 여자를 진상한다. 그 높은 장군은 여자 대학생 같은 지성과 미모를 갖춘 숫처녀를 선호한다는 소문이 전방의 많은 장병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있었는데, 오늘 그 간택의 현장을 목격했으니 하늘에 떠 있는 모든 별들이 신기루의 허상처럼 보일 것이 아닌가?”(박남식, 2004 ‘실낙원의 비극’ 중)
6·25전쟁 중 의무병으로 근무했던 저자가 틈틈이 적어둔 일기를 묶어 펴낸 책의 한 대목이다. 저자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민감한 내용’들이 적지 않은 이 일기장을 꼭꼭 숨겨 두었다가 휴전 50년이 지난 뒤에야 출판했다. 당사자가 서슬 퍼런 권력을 휘두르는 동안에는 땅 속 깊이 묻혀 있던 이야기도, 세월이 흐르면 다시 불쑥 솟아 나와 사람들의 눈과 귀로 전해지게 마련이다. 본래 윗사람은 속여도 아랫사람은 속일 수 없는 법이어서 영원히 숨길 수 있는 비리와 비행이란 없으니 역사란 이렇듯 무겁고 무섭다.
사람으로 태어나 청명(淸名)을 역사에 새기지 못할 바에는 이름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편이 낫다. 유취만년(遺臭萬年·더러운 이름을 후세에 오래도록 남김)이라, 이름에 따라붙은 냄새를 길이 전하는 것은 자신에게뿐 아니라 조상과 후손에게까지 욕이 되는 일이다.
지난번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도 여러 고위 공직자 후보들이 이런 저런 의혹으로 곤욕을 치른 끝에 낙마했다. 이미 여러 차례 진행돼 자질과 품성, 재산 형성 과정에 대해 어떤 질문이 나올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후보자들은 의혹 제기의 탄막(彈幕)을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청문회가 정권의 발목을 잡는 수단이자 정쟁의 마당이 된다고 해 그 무용론을 주장하는 소리도 작지 않으나, 공직 사회의 도덕적 표준을 정립하는 데에는 분명 의미 있는 제도이다. 청문회 폐지는 공직자와 공직 희망자들이 당장의 출세보다 역사의 평가를 더 중시하는 자세를 다잡은 뒤에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