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 ‘아시아 삼국지 만화전’… 한중일 3國 3色 비교

입력 2010-09-09 19:37


여기 세 명의 관우가 있다.

옛 그림에서 찾은 삼국지 명장 관우의 한·중·일 버전이다.

트레이드마크인 긴 수염과 청룡언월도,

매서운 눈매는 엇비슷하되 얼굴빛과 복장에서는 차이가 제법 크다. 19세기 ‘회본통속삼국지’에 삽화로 등장하는

일본 관우(3)는 장식적 복색에 사무라이처럼 등 뒤에 검을 꽂았다.

유사한 구도의 한국 중국 그림.

그래도 볼이 늘어진 둥근 얼굴과

경극배우 분장의 중국 관우(2)는

차분한 낯빛에 단색 옷을 입은

한국 관우(1)와는 확연히 다르다.

다음은 백정 출신의 거칠고 우직한 장비. 일본 에도시대 말기 우키요에(목판화) 화가 우다가와 구니요시의 ‘장비상’은 이목구비와 수염을 과장해 격정적 모습(5)인 반면, 조선시대 무속화 ‘장비장군’(4)은 사모관대에 지팡이 짚고 앉은 게 양반 품새다. ‘양반님네’로 만드는 게 최고 대우였던 당대 사고가 반영된 그림이다.



오랜 라이벌 한·중·일 삼국의 문화적 동질성과 차이를 들여다보기에 삼국지는 흥미로운 도구다. 유교 한자 같은 동아시아 문화 유전자가 그렇듯, 중국에서 만들어졌으되 세 나라가 재해석해 활용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삼국지 인기는 21세기에도 식지 않아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처세서 등으로 끊임없이 변신하고 있다. 1913∼2004년 한국에서 나온 삼국지 관련 문화상품은 문학 288종, 만화 55종 등 모두 400종이나 된다.

오는 15∼19일 부천에서 열리는 국제만화가대회&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는 부대행사로 ‘아시아 삼국지 만화전’이 마련된다. 세 나라 대표 삼국지 만화 12종을 전시하고, 삼국지 관련 이미지와 스토리를 분석하는 콘퍼런스(16일)도 진행된다. 콘퍼런스 발제자 김상엽 문화재청 감정위원, 조성면 인하대 강의교수에게 한·중·일 삼국지 이야기를 들었다.



사무라이 관우와 양반 관우

차이를 확인하기에는 글보다 이미지가 유용하다. 글은 중국 삼국지를 베껴도, 서책에 끼워 넣는 삽화는 자국 화가가 새로 그렸다. 또 민간에 유통된 민화(중국은 연화로 불린다)와 일본 판화 우키요에에는 당대 의식주 문화와 세계관, 취향이 스며들었다.

한국에서는 삽화보다 삼국지 민화가 주류였다. 서낭당, 점집 등에서 쓰던 기복(祈福)용 그림들이다. 전문 화원이 아니라 아마추어 화가들이 그려 생략이 과감하고 해학적 정서가 두드러진다. 대신 완성도는 떨어지는 게 많다. 19세기 ‘제갈량, 유비, 관우, 장비’를 보면, 삼국지 캐릭터들이 어떤 한국적 변용과정을 거쳤는지 확인할 수 있다. 제갈량은 오른손에 붓, 왼손에 서책을 들고 관복 가슴에 흉배까지 단 문인으로, 장비는 한결 온화한 표정의 무인으로 묘사됐다. 적토마를 탄 관우의 활약상을 그린 20세기 삼국지 병풍. 산에 매복한 위나라 병사들에게 죄다 일본 순사복을 입혔다. 김 위원은 “유비 관우 장비의 촉나라는 우리 편, 조조의 위나라는 일본=적이라는 등식이 있었다는 걸 시각적으로 보여 준다”고 했다.

중국에도 기복용 삼국지 연화가 많았다. 복잡한 장식과 화려한 색감, 경극에서 차용한 구도 등이 특징이다. 세 나라 중 한눈에 스타일을 감지할 수 있는 건 역시 일본이다. 구도는 씻은 듯 말끔하고 깎은 듯 정확하다. 그런 화면 속에 가부키 배우 같은 삼국지 인물들이 빈틈없이 들어가 있다.

각자 개성은 있지만 그래도 가까운 게 한국과 중국 그림이다. 김 위원은 “국경을 맞댄 한·중이 비교적 교류가 많았다면 책으로 중국을 접한 일본은 일본인이 생각한 중국인을 독자적으로 이미지화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천연덕스럽게 사실적인 묘사를 한 건 일본 삼국지 그림의 또 다른 특징이다. 유안이 처를 살해해 주군(主君) 유비에게 고기를 대접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조선시대 화원이 삽화를 그린 ‘중국소설회모본’에는 아예 칼 든 장면이 없다. 솥단지가 나오고 유비가 음식 접시를 받을 뿐이다. 중국에서도 직접 묘사는 드물다. 반면 일본 ‘회본통속삼국지’를 보면 훼손된 유안 처의 넓적다리와 낭자한 피가 적나라하게 표현됐다.

“중국 한국이 주군을 섬기는 유안의 태도에 초점을 맞췄다면 일본에서는 처를 칼로 치는 순간의 묘사가 냉정하고 자세합니다. 조조의 친위대장 전위가 화살을 많이 맞아 죽는 장면도 굳이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잔뜩 꽂힌 모양새를 그린다든지, 목이 날아간 시신을 전시하듯 목과 몸통을 분리해서 상세히 그린다든지.”

김 위원은 그림의 전반적 완성도에서는 일본 우키요에, 분방한 상상력은 한국 민화, 질과 양을 포괄한 다양성 면에서는 중국 연화에 높은 점수를 줬다.



천재 고우영 vs 비관론자 요코야마

‘고우영 삼국지’와 ‘천웨이동 삼국지’, 요코야마 미쓰테루의 ‘전략 삼국지’는 이번 행사를 위해 뽑은 한·중·일 대표 삼국지 만화다. 한때 저급문화로 천시되던 만화. 하지만 발제자들은 세 편의 삼국지 만화에 삼국의 수천 년 미술전통과 근·현대 문화역량이 집약돼 있다고 말했다.

그중 고우영(1934∼2004)과 요코야마 미쓰테루(1938∼2005) 작품에서는 민화와 우키요에의 흔적을 봤다. 김 위원은 “고우영의 펜 끝에서는 민화적 전통이 슬쩍 엿보인다. 민화가 작가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기보다는 일본 중국 작품에서 보기 어려운 고 화백의 자유로운 펜 맛이 분방했던 민화적 전통을 뿌리로 해서 태어났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요코야마의 ‘전략 삼국지’는 고우영 삼국지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화면은 우키요에처럼 빈틈없이 단정하고 반듯하되, 시선은 조용하고 비관적이다. 태양 아래 개미떼처럼 움직이는 군중, 표정 없는 얼굴은 절대적 질서 아래 희생되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우울한 세계관을 드러낸다.

평가는 고루 후했다. 고우영 삼국지는 촌철살인 유머와 파격적 캐릭터 해석이 장점이다. 김 위원은 “만주 태생의 고 화백은 중국문화를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받아들였고 이를 획기적으로 재해석했다. 무엇보다 인간본성에 대한 관조와 유머는 탁월하다”고 평했다. ‘전략 삼국지’도 일본 내 삼국지 재해석의 두터운 전통이 만들어낸 명작으로 평가받았다.

조성면 교수는 고우영 삼국지를 탈영웅의 혐전(嫌戰) 서사라고 평가했다. 고우영이 영웅서사, 전쟁서사인 삼국지의 영웅스토리를 해체했다는 것이다. 고대 이야기가 고우영에 와서 신랄하고 위트 넘치는 현대적 삼국지로 재탄생했다. 다만 고우영 삼국지는 “척박한 환경에서 한 명의 걸출한 작가가 이룬 성과”라고 했다.

반면 천웨이동(1971∼) 삼국지에 대해서는 “중국 문화역량의 한계를 보여준다”는 혹평이 나왔다. 조 교수는 “중국 대중문화는 아직 고전을 재해석, 재창조해낼 만큼 심리적으로 자유롭지도, 문화적으로 역동적이지도 않은 상태”라며 “기존 스토리를 잘못된 방식으로 답습했다”고 비판했다.

작품성에서는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지만 천웨이동 삼국지는 디테일에 강한 만화로 평가받았다. 중국 정부의 전폭적 지원 하에 제작된 작품은 경보병과 중보병, 경기병과 중기병의 투구, 갑옷, 무기까지 세분해 그릴 만큼 고증에 신경을 썼다. 김 위원은 “삼국지 시대는 입식이 아닌 좌식 생활이라 의자를 사용하지 않았고 연회에서도 큰상 대신 독상을 놓고 각자 식사를 했다. 천웨이동 삼국지는 이런 고증이 정확히 이뤄졌다”고 했다.

스토리 측면에서는, 유비 중심의 옹유반조(擁劉反曹) 경향이 강한 한국 중국과 조조를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로 묘사하는 일본이 차이를 보였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