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손수호] 이토 히로부미와 次韻詩

입력 2010-09-09 19:01

작가 김훈이 ‘소설 안중근’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대척점에 선 이토 히로부미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세계를 경영하려는 포부와 조선에 대한 그의 속내를 알기 위해서는 학습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금쯤 이미 터득했을지 모르지만.



이토의 정신세계의 일면을 알 수 있는 글씨가 서울에서 전시되고 있다. 작달막한 키에 흰 수염이 얼굴을 덮은 영감이 아니라 고고한 문인의 모습으로 한시를 즐긴 흔적이다. 대표적인 예가 지금 서울 인사동 옥션 단의 ‘대한제국과 근대’전에 나와있는 ‘취운아집(翠雲雅集)’. 이토가 1909년 조선을 떠날 때 열린 송별연에서 주고받은 시를 모았다. 이토의 칠언절구 한시에서 운(韻)을 따서 화답하는 차운시(次韻詩)가 3장의 두루마리에 담겼다.

9월 16일∼10월 24일 서울 예술의전당 V갤러리에서 열리는 ‘붓길, 역사의 길’전에도 이별의 슬픔을 담은 이토의 붓글씨가 나온다. ‘惜別群情更?然 韶顔華髮卽神仙 交隣覇月盟壇在 和氣天長兩國邊’(사람들과 헤어지자니 더욱 아쉬워/고운 얼굴에 흰 머리는 바로 신선들이다/교린의 기월이 맹단에 남아 있으니/양국에 화기가 오래 맴돌 것이리라).

문제는 공간구성이다. 이토는 1908년 5월 국취루에서 차운시를 즐기는 회식에서 글씨를 쓰면서 가로 38.8㎝, 세로 101㎝의 종이 가운데 4분의 3을 차지해 버렸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시회(詩會)의 에티켓을 저버린 것이다. 글씨는 쓴 사람의 인격을 반영하는 법. 이토의 붓질은 옹색하고 답답한 느낌을 준다.

차운시의 내용은 읽기에 민망하다. 을사오적 중 한 명인 박제순은 ‘出世風姿自卓然 退休樂地作神仙’(세상에 우뚝 선 풍모는 스스로 탁월하셔서/물러나 쉬는 즐거운 곳에서 신선이 되시었네)이라며 이토를 추앙했다. 조선의 정치·문화계 인사 53명과 일본인 2명이 쓴 ‘취운아집’도 비슷한 내용이다. 이들의 글을 보면 억지스러운 아부가 아니라 이토라는 인물에 빠져 거의 흠모 수준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여겨질 정도다.

날씨가 식어지면서 한일 강제병합 100주년의 열기도 서서히 식고 있다. 몇 차례의 이벤트형 행사로 기념이 마무리됐다고 생각하는 걸까. 개운치 않다면 망국을 전후해 이토와 그를 둘러산 인물들의 필적을 보면서 국치 100년의 의미를 이어가는 것도 괜찮겠다. 이토는 한일 병합의 기획자이자, 연출자이자, 실행자이자, 완성자였기 때문이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