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溫 시네마] 맥 라이언이 일깨워준 ‘사랑의 가치’
입력 2010-09-08 19:15
별다른 감흥 없이, 마치 오래된 샐러리맨이 직장을 다니듯 하늘나라의 일을 하고 있는 세스(니콜라스 케이지)는 여느 때처럼 지상의 병원에 들러 막 숨을 거두는 생명 하나를 기다리는 참이다. 말이 좋아서 영혼을 천국으로 안내하는 가이드 천사라지만 세상 사람들에겐 공포일 수밖에 없다. 그나마 그 일조차 세스에겐 무료하기 그지없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라곤 먼동이 틀 때와 석양이 질 때 해변에서 그 소리를 듣는 것과 그게 아니면 도서관에서 헤밍웨이 책을 읽는 것이다. 그런 그의 눈에 자신이 집도하는 도중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환자 때문에 절망에 빠진 메기(맥 라이언)의 모습이 들어온다.
그녀가 환자를 살리지 못한 것은 세스가 결국 그 영혼을 데려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세스는 이제 막 그런 그녀와 사랑에 빠질 참이다. 문제는 인간인 메기는 천사인 세스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1998년 브래드 실버링이 만든 ‘시티 오브 엔젤’은 그보다 11년 전에 나온 독일 빔 벤더스 감독의 ‘베를린 천사의 시’를 할리우드 판으로 리메이크한 것이다. ‘시티 오브 엔젤’은 흑백인 데다 고담준론의 설파력이 강했던 원작보다 훨씬 연성의 러브 스토리 느낌을 강화한 탓에 대중적으로는 더 큰 인기를 모았다. 거기에는 당대 스타였던 니콜라스 케이지와 맥 라이언이라는 스타 캐스팅 덕이 컸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캐나다인 뮤지션 사라 맥란클란의 주제곡도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세스가 메기를 처음 만나게 되는 도입부 장면이 많은 관객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다. 수술 도중 환자를 잃은 메기는 병원 비상구 계단에 홀로 앉아 흐느낀다. 그런데 그 모습이 그렇게 슬프고, 불쌍하며 아름다울 수가 없다. 늘 죽음을 앞두고 사는, 그래서 냉정할 듯싶은 직업의 여의사와는 상충되는 모습인데, 그 역설의 모습에 사람들은 살짝 눈물을 훔치게 된다.
우리 스스로에게도 같은 마음이 존재하는 바, 엄혹한 경쟁과 경제의 시대에 본래의 자화상을 잃고 살아 온 자신들을 새삼 돌아보게 만든다. 영화 속 천사 세스처럼 영화 밖 관객들도 그런 메기를 사랑하게 된다. 세스는 사람이 되기 위해, 메기와 사랑하기 위해, 고공에서의 추락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추락이 아니다. 그건 새로운 비상이다.
할리우드 영화는 종종 신파의 감성을 극단으로 밀고 간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할리우드 영화의 장점이자 미학의 준거다. 여기에서의 신파란 단순히 절절한 멜로 라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할리우드산 러브 스토리는 두 사람만의 사적인 사랑 이야기를 보통의, 그래서 보편적인 무엇으로 끌어올린다. 그 중간의 기제는 나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와 배려이고 또 희생이라는 개념이다. 메기는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 운명의 환자였음에도 그의 죽음을 자신의 아픔처럼 받아들인다. 배려의 마음이다. 세스는 그런 그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다. 숭고한 사랑이다. 무엇보다 희생이다.
영화 ‘시티 오브 엔젤’은 선남선녀의 멜로극이어서가 아니라 이 시대에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사랑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늘 새롭게 기억되는 영화다. 안타깝게도 둘의 사랑은 지상의 현실 속에서 결실을 맺지 못한다. 좋은 일은 늘 그렇다. 아쉽게 끝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을 영원히 기억하고 간직하게 하는 방법 중의 하나다.
오동진(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