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정원교] 공정, 왜 지금인가

입력 2010-09-08 17:56


“선진국으로 올라서기 위해선 기술혁명과 동시에 의식혁명도 이뤄내야 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우리나라 1인당 명목 국민소득이 2만 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최근 전망했다. 이대로라면 지난 2007년 이후 3년 만에 다시 2만 달러 선에 턱걸이하는 셈이다. IMF는 그러나 우리나라는 2015년에도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고지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내년 이후 성장동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내다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획재정부는 2010년대 내에 3만 달러 달성이 가능하다고 반박했다.

문화지체(culture lag)는 급격한 사회변동 과정에서 각 부문 간 변화 속도의 차이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과학기술 등은 빨리 변하지만 사람들의 의식구조는 그렇게 빨리 바뀌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이로 인해 가치관 혼란, 이념 갈등 등 다양한 사회문제가 생겨난다. 우리 사회는 1960년대 중반 이후 엄청난 속도로 바뀌어 왔다.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효율성만 추구한 나머지 편법과 탈법이 판을 쳤고 부정부패도 만연했다.

미국 엔론사 최고경영자로 대규모 회계 부정을 저질렀던 제프리 스킬링이 한국인이었다면? 아마 지금쯤 원래 자리로 돌아와 주요한 결정들을 내리고 있을 것이다.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FT) 한국 담당 기자는 한국 기업의 책임성 부재가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경제의 불투명성·불확실성 때문에 외국인들이 한국 기업의 주가를 실제 가치보다 낮게 평가하는 것)’를 초래한다며 이같이 비꼬는 칼럼을 최근 FT 블로그에 올렸다.

그는 이 칼럼에서 한 재벌그룹 회장이 오는 11월 서울에서 개최되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와 연계된 ‘비즈니스 정상회의’의 의장을 맡았다고 썼다. 이 회장이 ‘비즈니스 정상회의’의 12개 워킹그룹 중 신재생에너지 논의를 주도하게 됐다는 얘기다. 칼럼은 이 회장이 분식회계 혐의로 실형을 살았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또 유럽이나 미국에서라면 문제의 회장 같은 사람이 공개 무대에서 활약하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공정한 사회’라는 국정 어젠다가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게 아니었다면 정치권이나 공직사회에 똬리를 튼 비리나 잘못된 관행이 요즘처럼 확실하게 단죄될 수 있었을까. 15년 만에 처음으로 현역 국회의원이 회기 중 구속된 게 대표적이다. 정관가에서는 공정(公正)이 곧 사정(司正)을 의미하는 건 아닌지 경계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공정한 사회라는 용어를 놓고도 설왕설래가 한창이다.

이쯤 되니 청와대가 그제 다시 한번 개념을 정리했다. 공정한 사회는 ‘기계적 평등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기회를 극대화하는 사회’이면서 ‘사회적 책임을 지는 사회’라는 설명이다. 당연히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거론됐다. 이 같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허전함은 남는다. 공정한 사회에 대한 정의를 내리긴 했지만 그러한 사회가 실현됐을 때 우리가 접하게 될 구체적인 사회상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 일요일 청와대에서 열린 장차관 워크숍 당시 내걸었던 ‘더 큰 대한민국’의 모습이 궁금해진다.

지난해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국가 부패지수를 보면 우리나라는 10점 만점에 5.5점으로 180개국 가운데 39위(순위가 높을수록 부패 정도가 덜함)에 머물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에서는 하위권이었다. ‘강자가 약자를 배려하는 나라’만큼이나 ‘부패가 힘을 쓰지 못하는 나라’ 또는 ‘반칙이 통하지 않는 나라’를 강조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각 분야에서의 불공정 게임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생각해보라.

우리 사회도 이제 문화지체를 극복할 수 있는 단계가 됐다. 즉 공정한 사회를 논할 정도에 도달한 것이다. 이를 통해 사회적 투명성을 높인다면 이는 곧바로 국가 경쟁력 강화로 이어진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한 단계 더 올라서기 위해선 기술혁명뿐 아니라 의식혁명도 동시에 이뤄내야 하는 건 이 때문이다. 한국 경제는 지난 7∼8년 동안 선진국 문턱에서 정체 상태를 면치 못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달성도 의식구조 변화라는 바탕 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정원교편집국부국장 wkch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