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진 폐허 속 피어나는 조니아의 꿈… 열한살 소녀, 한발로 딛고 서다
입력 2010-09-08 17:48
한국교회희망봉사단과 함께하는 회복
사람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자연재해를 당한 아이티, 미얀마, 중국 쓰촨성 등지에선 아직도 탄식이 이어지고 있다. 지구촌 이웃은 그 재해를 곧 잊었으나 그들은 슬픔과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한 채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긴 어둠의 터널 속. 주저앉은 채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는 그들에게는 눈물 마를 날이 없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서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 한국 기독교인들의 정성스러운 기도가 그들에게 한 줄기 빛을 주고 있다. 이들에 대한 구제는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는 실천이기도 하다. 한국 기독교봉사단체의 헌신적 구제 노력과 그로 인한 회복을 ‘이웃’에서 전한다.
분홍색 커튼을 젖혔다. 한 평 남짓 되는 작은 방이 눈에 들어왔다. 썩는 냄새가 스멀스멀 흘러 들어왔다. 한쪽 벽면에 붙어 있는 조그만 침대에 덮인 흰색 천은 누렇게 변색돼 있었다. 침대 바로 옆엔 오물 범벅이 돼 있는 싱크대가 언제 무너질지 모르게 위태롭게 서 있었다. 침대에 엉덩이를 살짝 댄 채 방을 둘러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몇 분쯤 지났을까. 분홍색 천이 펄럭이고 조니아(11·여)가 얼굴을 보였다. 커다란 눈이 유독 예뻤다. 처음 만난 사람들 모습에 놀란 표정이었지만 이내 환하게 웃었다. 새하얀 이가 드러났다. 까만 피부와 배치돼 더 하얗게 보였다.
밝게 웃는 조니아의 겨드랑이엔 철제 목발이 꽂혀 있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겨드랑이가 배기는지 미간을 찡그렸다. 조니아가 옆에 와 앉아 수줍게 웃었다.
조니아는 오른쪽 다리를 쓰지 못한다. 조니아의 이모는 “목발을 몇 달 썼는데도 아직 잘 걷지 못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조니아는 ‘다리 한쪽 없는 게 뭐 그리 큰 문제냐’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베어 문 빵 한 조각
지난달 20일 만난 조니아는 허기져 있었다. 하루에 한 끼 챙겨 먹기도 어려운 가정환경 탓이다. 빵 하나를 건네자 양손을 내밀어 빼앗은 뒤 눈 깜짝할 새 베어 물었다. 조니아에게 지진이 일어났던 당시 상황을 물었다. 일부러 당시를 기억하지 않으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몇 분을 기다린 뒤에야 조니아가 입을 열었다.
아이티 포르토프랭스 내 시티 솔레(Cite-Soleil). 2010년 1월 11일 오후 4시53분이었다. 갑자기 굉음이 들렸다. 동네에서 조니아와 평소 함께 뛰어놀던 친구들은 신기한 듯 깔깔댔다. “땅이 흔들려!”라고 외치며 서로를 바라보고 웃고 있었다.
흔들림은 꽤 오랫동안 계속됐다. 조니아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를 찾아 집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발을 떼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친구들은 이미 빠른 걸음으로 조그만 구멍 속에 몸을 피한 뒤였다. 공포에 떨고 있던 조니아와 친구들의 눈이 마주쳤다.
“조니아, 얼른 이리와.” 친구 제니가 다급하게 외쳤다. 뛰기 시작했다. “다 왔다!” 친구들이 몸을 피한 곳에 도달했을 무렵 “쾅” 소리와 함께 조니아는 쓰러졌다.
며칠이 지났을까. 병원으로 옮겨진 조니아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함께 뛰놀던 친구들은 주위에 없었다. 불안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오른쪽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상체를 일으켜 다리 쪽을 보려 했다. 여기저기 다친 사람들을 돌아보던 의사가 조니아가 누운 침대를 지나다 깜짝 놀라며 “그냥 누워 있으라”고 했다. 왠지 모를 무서움이 엄습했다. 조니아는 눈물이 났다. 엉엉 울며 자신의 다리를 애써 들어 올렸다.
순간 조니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종아리가 보이지 않았다. 상체를 조금 더 일으키자 피범벅이 된 허벅지가 눈에 들어왔다. “보지 말라고 했잖아.” 의사는 머뭇 거리며 자리를 피했다.
지진이 일어났던 당시 친구들이 숨어 있던 곳을 향해 달려가던 조니아를 담이 덮쳤다. 조니아의 몸만한 바위 조각이 머리와 다리를 강타했다. 흔들림이 잠잠해진 뒤 구조됐을 때 조니아의 오른쪽 다리는 떨어져 나간 뒤였다.
당시를 생각하며 조니아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애써 슬픔을 참아보려 했지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조니아의 마음을 달래보고자 차가운 물 한 잔을 건넸다.
물 한 잔
애초에 물 한 잔으로 그의 마음이 진정될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서러운 눈물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조니아의 이모 역시 고개를 돌린 채 연신 눈물을 닦아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물을 꾹꾹 눌러 참으며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병원은 난장판이었다. 다친 사람들이 흘린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죽어나가는 참혹한 현장에서 조니아는 치료를 받았다. 천성이 긍정적이어서일까. 하루하루 지나면서 조니아는 점차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불안했다. 가장 보고 싶은 엄마와 아빠가 며칠이 지나도록 병실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입원 일주일 되던 날. 이모가 찾아왔다. 이모는 눈물을 흘리며 조니아를 가슴으로 꼭 끌어안았다. 조니아는 영문을 몰랐지만 눈물이 났다.
가까스로 눈물을 멈춘 이모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어린 조니아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엄마 아빠가 세상에 없다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모의 품에 안겨 “거짓말 하지 마”를 외치고 또 외쳤다. 하나뿐인 동생의 생사마저 알 길이 없다는 슬픈 소식만이 귓전을 울렸다. 어린 여자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힘든 일의 연속이었다.
이후 조니아는 병원에서도, 치료 후 이모 집에 돌아와서도 웃음을 보이지 않았다. 세상 속에 덩그러니 혼자 떨어진 느낌. 매일 밤 지진이 발생한 그날의 악몽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빵 부스러기
얘기를 하다 목이 말랐는지 조니아는 컵에 남아 있던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고는 곧 옷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들을 한데 모아 입에 털어 넣었다. 빵 하나를 다 먹은 조니아는 “맛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아이티의 아이들은 기분이 좋을 때 엄지손가락을 올리곤 한다). 그 모습이 귀여워 조니아 집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자 조니아도 오랜만에 하얀 이를 다시 드러냈다. 조니아는 웃음 띤 얼굴로 자신이 꿨던 신기한 꿈 얘기를 시작했다.
병원에서 퇴원해 집에 돌아온 지 두 달 정도 된 어느 날. 조니아는 침대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꿈속에 나타난 사람은 조니아가 그렇게도 보고 싶어하던 엄마와 아빠. 부모는 꿈속에서 조니아를 꼭 껴안으며 “사랑하는 조니아, 열심히 힘차게 자라나야 해”라고 속삭였다. 조니아는 급히 잠에서 깨 목발을 찾아 들고 엄마 아빠를 찾아 문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엄마 아빠는 온 데 간 데 없었다. 조니아는 침대에 앉아 골똘히 그 꿈을 되짚어봤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마음을 달리 먹기 로 했다. “엄마 아빠 만날 때까지 웃으면서 즐겁게 지낼 거예요.”
조니아는 이모와 함께 집앞 엘루넷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왠지 교회에 가면 엄마 아빠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어요”라고 수줍게 말했다. 이전엔 먹을거리를 주지 않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곳. 하지만 이제 매주일 목발을 짚고 친구들과 함께 가 기도를 드린다. 엘루넷교회는 한국교회희망봉사단이 국내 성도들의 성금으로 복구한 곳이다.
조니아는 “제겐 두 가지 희망이 있어요”라고 수줍게 말했다. 떨어져 살고 있는 동생을 만나는 게 첫 번째 꿈이다. “제 다리가 이렇게 된 걸 알면 속상해 할 거예요. 다리 고치고 동생 만나서 맛있는 거 먹고 즐겁게 지낼 거예요”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이모는 “아이티 북부 어느 곳으로 갔다는 얘기만 들려요. 기회가 될 때 조니아를 위해 동생을 찾아줘야죠”라고 약속했다.
조니아는 의사가 되고 싶어했다. 다리를 잃고 나서 힘들었던 때를 생각하면서 ‘나처럼 다리를 다친 사람들에게 다리를 선물할 수 있는 외과의사가 돼야지’라는 꿈을 야무지게 펼쳐 보였다.
어느덧 오후 4시가 지났다. 조니아가 살고 있는 시티 솔레는 아이티에서 가장 위험한 빈민가다. 무장한 갱들이 위협하는 곳이었다. 재빨리 차에 몸을 실었다. 어느새 마음이 가까워진 조니아가 목발을 내딛으며 문밖으로 나와 살짝 미소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차가 없어질 때까지 조니아는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 아이티
카리브해 서인도제도에 위치한 나라. 면적은 2만7750㎢. 흑인(95%)이 다수지만 소수 백인이 정치와 경제를 장악하고 있다. 종교는 가톨릭이 80%, 개신교가 16%이다. 올 1월 11일 수도 포르토프랭스 인근에서 대지진이 발생해 아이티 전체 인구의 3분의 1인 300만명이 피해를 입었다.
■ 한국교회희망봉사단
(KD·Korean Diakonia)
지난 1월 한국교회봉사단과 한국교회희망연대가 통합해 출범한 개신교의 대표적 봉사단체다. 사회복지, 재해구호, 자원봉사, 화해사역으로 성숙한 한국교회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첫 사업으로 아이티 지진구호를 위해 국민일보가 모금한 성금 등으로 100만 달러를 우선 지원했다.
포르토프랭스=글 조국현·사진 김지훈 기자 jojo@kmib.co.kr
※아이티 두 번째 이야기 30일자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