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수민 (7) 출석부·강의내용 통째로 외워 첫 수업

입력 2010-09-08 18:51


결혼식 이후 내 삶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막힘없이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것과 같았다. 34세에 박사학위를 받았고, 35세에 한남대 학과장이 됐고, 36세에 교회 장로가 됐다. 그리고 37세에 미국에 연구원 자격으로 국비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직전에 눈의 이상이 왔고 결국 미국에서 수술 후 실명을 하고 만 것이다. 미국에서 어려웠지만 1년간의 연구생활을 잘 마쳤다. 그리고 교수로 있던 한남대에 사표를 쓴 뒤 미국으로 다시 신학공부를 하러 가려던 계획을 세웠던 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다. 대학에 먼저 사표를 쓰고 학생을 가르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 한남대 오해진 학장은 이런 나를 말렸다.

“사표보다는 휴직원을 쓰고 가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동안 학교에 많은 기여를 하셨는데 실명했다는 이유만으로 학교를 두만두신다는 것은 그렇습니다. 우리 학교는 신학을 한 분도 교수로 필요하니 일단 휴직하시고 공부를 마치고 다시 오시지요.”

참 고마웠다. 예전에도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신 분이었다. 그 뜻대로 휴직원을 내고 미국행을 위한 절차를 차근차근 밟았다. 나는 미국 보스턴신학대학교 입학허가서를 바탕으로 학생비자 서류를 만들어 미 대사관에 제출한 뒤 인터뷰 날짜를 잡았다. 시각장애인이니 가족과 동행하는 조건이었다. 나는 교수도 지냈고 내 경력을 보았을 때 비자가 거부된다는 생각은 1%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거부’였다. 원인을 살펴보니 너무 완벽한 서류가 문제였다. 나는 입학허가서와 함께 내가 가족과 생활하고 공부할 수입원이 어디서 나올 것이냐는 질문에 대비해 미국교회 담임목사님이 내가 신학교에서 공부하며 연봉 1만 달러로 한인교회에서 설교목사를 하기로 했다는 서류를 첨부한 것이다. 그러니 대사관은 이를 학생비자가 아닌 취업비자라 판단하고 거부한 것이다.

나도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비자를 받기 위한 편법이 오히려 비자를 거부 당하게 만든 것이다. 나는 비자 인터뷰 후 고속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내내 기도했다. 하나님이 내 길을 인도하실 줄 알았는데 이 길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이 때 주신 말씀이 로마서 8장 28절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순간 조바심이 나고 걱정스러웠던 부분들이 안개가 걷히듯 사라지는 것을 체험했다. 이 길이 아니라면 새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단 학교에 휴직원을 냈으니 마음 편하게 1년간 쉬다 복직해서 다시 강의를 하기로 했다. 미국 메사추세츠 공과대학에서 석학들과 주고 받았던 생생한 화학관련 지식들을 제자들과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교수가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을 알면 학생들이 수강신청을 안 할 것 같았다.

1984년 복직한 나는 새학기 강의를 앞두고 학생들이 내가 시력이 아주 안 좋은 것으로만 알게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 일단 강의할 내용을 통째로 암기했다. 그리고 학생들 출석을 불러야 하니 학생들 이름도 통째로 외워 버렸다. 다행히 아내가 화학과 출신이기에 관련 강의자료를 읽고 강의안을 만드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신을 집중해 강의안을 외우니 마치 머리 속에 인쇄가 되듯 내용들이 입력됐다.

이윽고 첫 강의 시간이 되었다. 익숙하게 강단에 선 나는 학생들 이름을 출석부도 보지 않고 하나 하나 외우니 ‘우’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암기한 강의를 자연스럽게 풀어가기 시작했다. 미국에 다녀 온 내가 출석표도 안 보고 강의안도 안 보고 강의하자 금방 내 이야기가 학교 안에서 화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