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급한 北, 수해 발등의 불 끄고 南에 유화 제스처
입력 2010-09-07 21:58
쌀·시멘트 지원 요구 배경
북한이 지난 4일 대한적십자사 채널을 통해 쌀과 중장비, 시멘트 지원을 요청한 것은 수해 복구에 필요한 실질적인 지원과 동시에 우리 정부의 대북 유화책을 이끌어 내겠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북측이 쌀, 중장비, 시멘트를 요구한 것은 현재 겪고 있는 홍수 피해와 경제난의 심각성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북측은 우리 측 정부 고위 당국자가 “민간 차원의 쌀 지원을 전향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한 사실이 보도된 지난 5일보다 하루 앞서 쌀 지원을 요청했다. 5·24 조치에 따른 대북 압박 국면에서 북측이 자존심을 접고 우리 측에 먼저 손을 내민 셈이다. 그만큼 북한 내부 사정이 좋지 않다는 의미이고, 홍수 피해를 극복하는 데 중장비와 시멘트가 시급히 필요하다는 뜻도 담겼다.
보다 중요한 대목은 북측이 한적을 특정해 쌀 지원을 요청했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는 쌀이 군량미로 전환될 우려가 있고, 과거 정부에서 대북 퍼주기 논란이 있었던 만큼 일체의 대북 쌀 지원을 승인하지 않고 있다. 특히 한적은 표면적으로는 민간단체이지만 정부예산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준정부기구 성격이 강하다. 이 때문에 한적의 지원은 일반 민간단체가 쌀을 지원하는 것과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더욱이 당초 한적이 지난달 31일 북측에 제안했던 100억원 상당의 대북 수해지원 품목에는 라면 등 긴급식량은 있지만 쌀은 없었다.
따라서 북한이 한적을 통한 쌀 지원을 역제의한 것은 당국간 대화 가능성을 타진하려는 뜻이 담겼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북한은 쌀 지원 요청 이틀 뒤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대승호를 송환하겠다는 통지문을 보내왔다. 이는 남측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쌀 지원을 재개하라는 무언의 압박으로 해석된다.
김영수 서강대 교수는 “남북관계가 애매할 때 양면성을 띤 한적은 활용도가 높은 통로였다”며 “정부가 한적을 통한 쌀 지원을 승인할 경우 향후 대북지원의 문이 넓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북한이 쌀과 함께 요청한 중장비와 시멘트 역시 단순한 수해복구를 위한 긴급구호물품이 아니다. 북측에 중장비나 시멘트를 제공할 경우 포괄적 전략물자로 오해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우리 정부가 천안함 사태 이후 대북 대응원칙인 5·24 조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북측의 인도주의적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적절한 지원책을 찾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이다.
엄기영 기자 eo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