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수민 (6) 신앙과 학문 함께 할 대학에 입학
입력 2010-09-07 18:47
재수를 하던 중 교회 부흥회에 참석했다. 강사가 대전대흥장로교회 고원용 목사였는데 마침 우리 집에서 저녁 식사를 대접해 만나게 되었다.
“정 목사께 자네 이야기 들었네. 알아주는 수재라면서. 그런데 꼭 서울대를 가야만 할까? 나는 학문과 성경을 함께 가르치는 미션스쿨이 더 좋은데 말이야. 미국의 유명한 대학은 모두가 다 미션스쿨이란 것 자네 알고 있나? 이곳 대전에도 대전대(한남대 전신)가 미션스쿨이라네.”
그러면서 나 정도 실력이면 4년 내내 장학금을 받고 미국 유학도 보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전국 우수 장학생 20명을 뽑는 선발대회가 있는데 응시해 볼 것을 권유하는 정보도 주셨다.
결국 이 시험에 응시한 나는 100여명 중 4등을 해서 4년간 전액 장학생이 되었다. 입학하는 데 갈등이 있었지만 목사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입학 후에는 입주 가정교사를 통해 숙식이 해결됐기에 부모님의 시름을 덜어 드렸다. 내가 화학과를 택한 것은 물질과 물질이 결합해 새 성분을 만들어 내는 무한한 가능성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고교 때 화학반 활동을 하며 비누도 만들고 화장품도 만든 것이 너무나 재미가 있었다.
학교에 입학해 만난 화학과 교수 중에 로버트 괴테 선교사가 있었다. 한국이름은 ‘계의돈’이었다. 그는 미국 플로리다에서 화학을 전공한 후 세계 최초로 나일론 섬유를 개발한 듀퐁사의 책임연구원으로 부와 명예를 마음껏 누렸다고 한다. 고급 주택에 자가용 비행기까지 갖고 인생을 즐기다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가난하고 척박한 이 한국땅에 온 것이다.
나는 선교사가 복음만 전하는 줄 알았는데 교수로 봉직하며 한국의 인재를 키우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다. 더구나 그는 스스로 학교 발전을 위해 많은 후원금을 모금하고 미국에 있는 갖가지 고분자 소재 표본을 한국으로 가지고 와서 고분자 화학을 강의했다. 나 역시 그의 영향을 받아 고분자 화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설립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고 성경 동아리에서 영어성경과 전도훈련을 지도했다. 수시로 ‘성경과 과학’이란 주제로 창조론을 가르쳤다. 그는 종일 바쁘게 움직였는데 그리스도인의 헌신된 삶이 어떠한 것인가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삶은 내게 많은 도전을 주고 신앙의 다짐을 하게 만들었다.
내게도 특별한 관심을 보이며 세세한 지도를 아끼지 않았던 계 선교사는 항상 볼펜을 2개 가지고 다녔다. 하나는 학교에서 지급한 것이고 하나는 개인이 산 것인데, 출석을 부를 때는 학교 것을, 개인용무를 볼 때는 다른 것을 썼다. 나는 이것이 학생들에게 공과 사를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교육적 목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남대에서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에 가입해 리더로 활동하는 등 신앙과 학문을 함께 만족시킨 4년이 흘렀다. 대학 졸업 후 충남대 대학원에 진학해 학문을 이어가면서 예산고교 수학교사로 학생들을 지도했다. 일주일 중 4일은 수학교사로, 2일은 대학원생으로 지냈다.
1971년 공학석사 학위를 받은 나는 제일 먼저 은사인 계의돈 선교사를 찾았다. 모교를 위해 일하라며 조교 자리를 받았고 4년 후에 전임강사가 되었다. 남보다 빠른 승진이었다.
화학과 1년 후배 중에 김군자 양이 있었다. 이미 학교를 졸업하고 충남중학교 교사로 있었는데 한 교수님이 내게 중매를 해 주었다. 알고 보니 대학시절 그녀와 내가 쓴 글이 대전대 학보에 나란히 실린 적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서로에게 끌린 우리는 1973년 예산감리교회에서 화촉을 밝혔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