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황주리] 나이테에 관한 명상

입력 2010-09-07 17:32


“피부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중요해.”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탤런트 김희애가 밝은 미소로 보여주는 화장품 광고가 떠오른다. 과연 그럴까? 내 생각엔 모든 사람들은 다 다른 양상으로 나이를 먹는다. 어떤 사람은 얼굴로, 어떤 사람은 기억의 용량으로, 어떤 사람은 뒷모습으로, 어떤 사람은 머리칼의 색깔과 부피로, 어떤 사람은 활력으로.

하지만 나이에 관한 한 개인차가 큰 것은 사실이다. 엉뚱한 생각이긴 해도, 나는 지하철에서 나이 든 할아버지가 타시면 자리를 내줄까 말까 잠시 고민을 한다. 이분이 정력이 넘쳐나 여자들 성희롱이나 하고 다니는 분은 아닌가 하고 행색을 살핀다. 실제로 그런 노인들도 드물게 있는 까닭이다. 나이와 지위를 불문하고 사실 어떤 자리에서든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남자들이 가끔 있다. 재수가 없으면 그날로 텔레비전에 얼굴이 보도되는 불운을 맞을 사이코 패스들이 생각보다 적지 않은 것이다. 너무 화가 나서 그런 사람들을 용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내 귀찮아져 버린다.

요즘도 가끔 이런 일이 일어난다. 어디로 가려면 몇 번 지하철을 타야 되느냐고 묻는 낯선 아저씨에게 열심히 정성스레 대답하고 나면, 아저씨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어디 가서 좀 놀다 가면 안 될까요? 맛있는 것도 먹고.” 이럴 때는 정말 힘이 빠진다. 이뿐이랴? 밤늦은 시간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가 껌을 씹고 있는 내게 묻는다. “껌 하나만 주실래요?” 아무 생각 없이 남아있는 바둑 껌을 하나 주었다. 껌을 입에 넣고 씹어 대며 낯선 아저씨는 우리 여기서 내려 한잔하자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 겪었던 불쾌한 일들이 차례로 떠오른다.

몇 년 전, 친구의 생일에 초대되어 갔다가 그곳에 온 누군가의 차를 타고 집에 가던 길이었다. 집 동네가 같다기에 차를 얻어 탄 나를 집에 데려다준다는 핑계로 그는 어딘가에서 차를 세웠다. 내가 이유를 묻기도 전에 그의 몸이 내게로 숙여졌다. 순간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려 달라고 내가 말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당신이 너무 웃었잖아. 그거 내가 맘에 든다는 거 아니었어?”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일은 우리 세대만 해도 그렇게 힘들었다. 요즘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제 가족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여자들을 돈도 안 주면서 직업여성으로 대하는 사이코 패스들에게 묻는다. 물론 아동 성폭행범보다는 자신들이 나을 거라는 착각을 버려라. 도대체 이 무례함의 근원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하긴 남자든 여자든 나이 값을 하면서, 늙을수록 괜찮은 사람이 되는 일은 정말 쉽지 않다. 마음으로든 물질로든 남에게 넉넉하고 후한 사람, 살아온 경험이 마음의 훈장처럼 빛나는 사람, 남의 실수는 되도록 빨리 잊어버리고, 남에게 저지른 자신의 실수는 늘 잊지 않는 사람, 약자에게는 약하고 강자에게는 강한 사람. 나 자신의 나이테를 들여다보며 오늘도 나는 늙을수록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야무진 꿈을 꾸어본다.

황주리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