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윤호] 아름답지 못한 퇴장

입력 2010-09-06 17:56


역사상 스스로 물러날 때를 잘 알고 처신에 성공한 대표적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중국 춘추시대 월나라의 범려가 아닐까 싶다. 그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주인공인 월나라 왕 구천을 위해 견마지로를 다한 끝에 오나라 왕 부차에 대한 원수를 갚고 상장군에 오르자 미련 없이 월나라를 떠났다. 범려는 ‘새를 잡고 나면 활을 거둬들이고, 토끼를 다 잡으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蜚鳥盡良弓藏 狡兎死走狗烹)’는 말로 함께 고생한 대부 문종에게도 월나라를 떠날 것을 권유했다. 범려는 제나라에 가서도 재상에 올라 난세의 정치가로서 명망을 이어갔으나 월나라에 남아 있던 문종은 역모를 꾀한 혐의로 구천에게 죽임을 당했다.

진나라의 재상 이사(李斯)는 범려와 반대로 물러날 때를 놓쳐 후세에 교훈이 된 인물로 꼽힌다. 진나라 천하통일의 일등 공신인 이사가 승상에 오르자 그의 집에 선물을 가득 실은 수레가 수천대나 몰려들었다. 이사는 자신의 지위가 너무 높아진 것을 보고 앞날을 걱정해 탄식하면서도 권력의 끈을 놓지 못했다. 이사는 진시황이 죽자 유서 조작에 가담해 권세를 이어가려 했으나 결국 모반 혐의를 쓰고 참형을 당하는 비극으로 생을 마쳤다.

권력에 대한 미련이 화근

최근 지체 높은 분들이 물러날 때를 놓치고 아름답지 못한 뒷모습을 보이며 퇴장하는 사례가 잇따라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있다. 40대 총리 후보로 발탁돼 차기 대권 꿈까지 넘보던 김태호 전 경남지사가 그렇고, 정권 실세로 불리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내정된 신재민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 그렇다. 김 전 지사나 신 전 차관은 자신의 흠결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터이니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걱정이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문회에서 거짓말이나 죄송하다는 사과 한마디로 넘어가기를 바랐다면 앞날을 걱정해 탄식하면서도 권좌에 미련을 가진 이사와 다를 바 없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의 추락도 마찬가지다. 30여년간 엘리트 외교관의 길을 걸어온 끝에 외교 수장 자리에 오른 그는 8·8 개각 때도 유임돼 현 정권 최장수 장관의 영예를 안았다. 하지만 자신의 딸을 외교통상부 5급 직원으로 특채한 사실이 드러나 국민 여론은 물론 이명박 대통령에게까지 비판받고 사퇴했다. 유 장관은 딸이 특혜 받은 게 아니라 능력에 따라 채용된 것이라고 항변했지만, 선발 기준까지 바꾸고 내부 심사위원들이 밀어주기 평가를 했다니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다. 설혹 그렇지 않다 해도 유 장관이 말하는 딸의 어학 능력도 이미 특혜를 받은 것이다. 외교관의 딸로 태어나 영어를 배우고 익히기 좋은 환경에서 자라며 교육받았으니까.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도 우연의 요소가 작용하는 가정환경의 산물인 만큼 전적으로 그 개인의 몫으로 돌릴 수 없다는 미국 정치철학자 존 롤즈의 지적을 되새겨볼 일이다.

유 장관은 개각 때 교체 대상이었지만 G20 정상회의 준비 때문에 유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 장관 딸의 특채는 그의 유임이 결정된 후인 지난달 31일이다. 유 장관은 딸의 특채 소식을 들었을 때 탄식이나 했을까.

라응찬 신화 무너지나

신한은행의 최근 사태도 또 하나의 아름답지 못한 퇴장을 예고하는 듯하다. 신한은행이 신상훈 신한금융지주 사장을 배임·횡령 혐의로 고소하면서 촉발된 이번 사태는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과 신 사장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신 사장을 해임하기 위한 이사회를 소집하려고 이백순 행장이 일본 오사카와 도쿄 등지를 동분서주하며 재일교포 주주들을 설득하는 모습을 보며 신한은행 직원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이 사태가 어떻게 결말나든 라 회장과 신 사장은 모두 상처를 받게 됐다. 상고 출신으로 지난 30년간 신한은행과 신한금융그룹을 이끌어 국내 최우량 금융그룹으로 키운 라 회장의 신화가 무너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김윤호논설위원 kimy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