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수민 (5) 고교시절 독서·봉사 통해 신앙 키워

입력 2010-09-06 17:41


한국에 온 후 제일 먼저 내가 근무하던 한남대를 찾았다. 한남대는 대전대학에서 숭전대학로 이름이 바뀐 후 1982년 다시 바뀐 교명이었다. 이 대학은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파송한 윌리엄 린튼 선교사가 한국의 기독인재 양성을 위해 1956년 설립한 미션스쿨이다.



교정을 들어서는데 남다른 감회가 밀려왔다. 곳곳마다 내 젊음과 추억이 담겨 있는 학교였다. 아내를 만난 곳이기도 했다. 교정의 바람소리와 풀냄새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나는 이제 이것들을 볼 수 없다니 새삼스레 코끝이 찡했다.

실명되는 과정을 적느라 내 어린 시절 이야기는 건너뛰고 안 한 것 같다. 그러나 짧게는 소개를 해야 할 것 같다. 왜 하나님께서 부족한 나를 부르시고 쓰시고 계시는지를 여러분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방둥이 1945년생인 나는 충남 예산 신흥동이 고향이다. 우리 집안은 꽤 부농이었으나 일제 조선총독부에 토지를 몰수당한 뒤 가세가 기울었다고 한다. 그나마 부친(이봉순)이 예산군청 공무원을 하면서 극한 가난은 면할 수 있었다.

예산초등학교와 예산중학교를 다니며 1등을 놓치지 않았던 나는 고교 입학원서를 어디에 넣어야 할지 고민이었다. 서울 명문고 중 하나인 경복고는 최소한 갈 수 있는 실력이었는데 문제는 내가 서울에서 유학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더구나 내가 유학을 가면 내 여동생(이수란)은 중학교 입학을 포기해야 했다. 2명을 학교에 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께 예산농고 장학생으로 들어갈 테니 내게 들어갈 학비로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농고에 수석으로 입학한 나는 토목과에 적을 두었지만 대학입시공부를 주로 했다. 고교는 양보했지만 대학만은 서울대에 가리라 결심한 것이다.

그 무렵 예산성결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을 키웠다. 당시 담임은 정연권 목사님이셨는데 목소리가 워낙 우렁차 설교 시간에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내 신앙은 목사님 서재에서 신앙서적을 빌려다 탐독하면서 부쩍 자랐고 고등학생으로 주일학교 부장까지 맡아 열심을 냈다.

내 신앙이 진짜 자란 것은 고교 2년 겨울방학 때 열린 부흥회에서였다. 현성초 목사님이 강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회개의 눈물과 함께 방언이 터지며 주님의 자녀로 영생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당시 고교생으로 용돈도 부족한 터에 교회에 헌금을 거의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런데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오가는데 중간에 형제고개가 있었다. 이곳에 도랑이 하나 있는데 가재가 잘 잡혔다. 시장에서는 이 가재가 약재로 쓴다며 매입을 했고 나는 가재를 잡아다 열심히 시장에 팔았다.

몇 개월 가재를 잡아 번 돈으로 당시 우리 교회에 없었던 강대상용 종을 내 돈으로 사다 헌물했다. 여기에 감격한 정 목사님은 예배 시간에 나를 불러 축복기도를 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교회에 워낙 인재가 없었던지 목사님이 출타를 하거나 안 계시면 내게 설교를 하라고 부탁을 하시곤 했다.

1964년 서울대 화공과에 응시했다. 그런데 화공과가 다른 과와 달리 10대 1이나 됐다. 나름 시험은 잘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낙방을 하고 말았다. 전국에서 모여 든 수재들의 벽은 높았다.

낙심했지만 1년 더 공부하기로 했다. 주변에서는 2차에도 좋은 대학이 많다고 했지만 시험을 보지 않았다. 학비가 싼 것도 이유지만 서울대만큼은 꼭 내 힘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이것도 내 고집이었음을 고백하게 된다. 하나님의 방법은 이것이 아닌데 자신의 길을 계속 고집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적지 않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나를 단번에 진로를 바꾸는 사건을 만드셨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