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김혜림] 여성들이 어쩌란 말이냐
입력 2010-09-06 17:54
‘우리가 어쩌란 말이냐/우리가 어쩌란 말이냐/사장님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우리가 어쩌란 말이냐/여성들이 어쩌란 말이냐.’
며칠 전 한 국회의원이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의 딸 특채 파문과 관련해 노천명 시인의 ‘사슴’을 패러디했다기에 나도 한번 흉내 내 봤다. 유치환님께는 더없이 죄송스럽지만.
고용노동부가 엊그제 발표한 ‘적극적 고용개선조치’(AA) 대상 사업장 조사 결과를 보면서 답답해서다. 이번 조사를 보면 고용개선조치 이후에도 여성 고용률은 35.60%에 머물고 있으며, 4곳 중 1곳에는 여성관리자가 1명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AA는 2006년에 도입했으니 아직 몇 년 되지 않았다. 모든 일이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AA가 여성 고용 활성화와 관련된 첫 법안이 아니기 때문에 느긋할 수 없다. 여성차별철폐협약(1982), 남녀고용평등법(1987), 여성의 발전과 평등이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문제임을 천명한 배이징행동강령(1995), 남녀평등과 여성발전 도모를 위한 여성발전기본법(1995) 등을 오래전에 이미 비준 또는 제정해도 여성의 노동시장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새로운 사실은 아니지만, 지난주 우리나라 여성들 정말 대단하다 싶어 어깨에 힘이 팍 들어갔던 터라 새삼 실망스럽다. 부산에서 8월 30일 개막한 제10회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를 취재했다. 참가한 해외거주여성 228명의 활약상은 눈부셨다. 그들은 어려운 처지에서 최선을 다해 성공을 일궈냈고, 실패조차 밑거름 삼아 도약했다. 서독에 간호사로 나갔던 한 여성은 주경야독으로 의사자격증을 따 병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캐나다 한인 정치세력화의 임무를 띠고 출마한 하원의원선거에서 실패한 여성은 이를 디딤돌로 삼아 상원의원이 됐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자리에서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음식점을 하는 이는 김치를 매스컴에 소개해 한식세계화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교육계에 있는 이들은 공립고교에 한국어 교육을 할 수 있도록 정부 예산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들을 보면서 때마침 국제무역연구원이 발표한 ‘2008년 한국 수출 1위 품목’에 여성인력도 포함시킨다면? 즐거운 상상을 했다. 그 상상은 역대 가장 잘못된 정책은 산아제한이라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졌다. 1960년대 가족정책이 시행되면서 태어나지도 못하고 사라진 딸들이 수없이 많다지 않은가. 아들 낳을 때까지 무작정 출산할 수 없게 되자 아들만 골라 낳으려 했기 때문. 비명횡사하는 딸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태아성별감별 의사 처벌법(1996)까지 생겼다. 그때 딸들이 다 태어났으면…. 하기야 산아제한 정책이 태어나지 못한 딸들만의 문제일까. 최근 국가적인 문제로 떠오른 저출산의 씨도 정부가 뿌린 셈이니. 50년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국가정책이라니 얼마나 한심한가.
산아제한은 1960년대 개발도상국이었던 우리 정부가 취할 수밖에 없었던 정책이라는 변명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 후유증은 국가 존망이 우려될 만큼 심각하니 성공한 정책으로는 보기 어렵다. ‘여성인력의 활용은 21세기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란 명제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란 유행가 뺨칠 만큼 진부하지만 진실이다. 지금 당장 모성보호 비용을 이유로 여성노동력을 배척하는 기업과 노동시장의 미래는 밝을 수 없다.
이번 발표에 따르면, 대기업보다 공기업이 여성채용에 더욱 소극적이다. 여성고용 비율이나 여성관리자 비율 모두 민간기업에 비해 공공기관이 저조하다. 정부가 먼저 모범을 보였으면 한다. 현재 17개 부처와 1개 특임장관 중 여성 수장은 2명뿐이다. 11%에 불과하다. 8·8개각에서 총리와 지식경제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지명자가 자진 사퇴했다. 딸 특채란 불미스런 일로 외교통상부 장관 자리도 비게 됐다. 불행한 일이지만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보자. 여성인사 기용을 적극 검토하길 바란다.
김혜림 문화과학부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