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31) 고종의 ‘황제어새’

입력 2010-09-05 17:36


정말 고종의 저주가 내려진 것일까요? 대한민국 4대 국새를 만든 민홍규씨에 대한 경찰 수사 결과 모든 것이 사기극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박물관쪽 사람들이 하는 얘기입니다. 해외에 유출된 대한제국 고종의 ‘황제어새(皇帝御璽)’를 환수해 지난해 보물 1618호로 지정할 때 민씨가 가짜라며 반대했던 것을 두고 “고종의 원한이 국새 파문을 일으키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조선왕조의 대군주(大君主) 고종은 이웃인 청나라, 일본 등과 대등한 국가 위상을 확립하고자 1897년 10월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새출발을 하게 됩니다. 대한제국은 황제국으로서 국사(國事)에 사용할 국새(國璽), 임금이 쓰는 어새(御璽), 황실의 개인 도장인 어보(御寶) 등을 모두 새로이 제작했답니다. 이는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인 소장가로부터 어렵게 사들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 중인 고종의 ‘황제어새’는 이 책에 수록되지 않아 진위 논란을 낳았던 것이죠. 대한제국의 어새류는 가로·세로가 각 10㎝ 전후로 큰 것은 12㎝이고 작은 것은 9㎝ 정도인데 ‘황제어새’는 5.3㎝에 불과하다는 점도 진위 논란을 확산시키는 근거가 됐습니다.

국새를 만든 민씨도 가짜 주장에 힘을 실었죠. 민씨 자신이 국새 제작 비법을 전수받은 유일한 옥새전각장이라고 주장했으니 진짜 옥새가 나타나면 모든 것이 탄로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가짜라고 폄하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국가의 안위가 풍전등화에 놓인 상황에서 고종은 비밀리에 사용하기 위해 지니고 다니기 쉽게 미니 어새를 제작했으며, 당시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보인부신총수’에 공개적으로 등록하지 않은 것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새를 보관하는 함 안에 인주(印朱) 함까지 넣은 이유도 어떤 상황에서든 손쉽게 사용하기 위한 것이랍니다.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황제어새’가 사용된 사례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1903년 8월 15일 러시아 황제에게 비밀리에 보낸 친서, 같은 해 11월 23일 이탈리아 군주에게 보낸 친서, 1904년 7월 1일·9월 6일·11월 20일, 1905년 1월 10일·4월 3일 러시아 황제에게 잇따라 보낸 친서, 1906년 1월 독일 황제에게 보낸 친서, 같은 해 6월 22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5개국(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헝가리 독일) 국가원수들에게 보낸 친서에 ‘황제어새’ 직인이 찍혀 있습니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제작한 어보는 종묘에 여러 점이 보관돼 있지만 중국으로부터 하사받은 국새는 남아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대한제국 때 비로소 국새를 떳떳하게 만들었고, 현재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된 것은 ‘황제어새’가 유일하답니다. 엉터리 국새 파문 이후 국새를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다시 만들어야 한다면 대한제국의 자존심이 담긴 ‘황제어새’를 모델로 삼아 학계의 문헌연구와 장인들의 기법을 총동원해 제대로 제작할 것을 제안합니다.

문화과학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