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애옥] 선생님 전상서
입력 2010-09-05 17:47
선생님, 혹서와 태풍 후에 여름의 끝이 보입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것들에 끝이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다행스럽고 우리 인간들을 더욱 겸손하게 만드는 자연현상으로 여겨집니다.
방학을 이용하여 수술 받으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병문안 오는 사람도 없이 병을 다스리셨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좋은 일만 나누시고 안 좋은 일은 혼자 감당하시는 성품을 모르지 않지만 죄송하고 섭섭한 마음이 앞섭니다. 신세를 져야 정이 든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실력도 배경도 없고 나이까지 많아 공부하는 내내 위축되고 힘들어하는 촌여자인 제게 선생님은 진즉 수첩에 수제자로 적어 놓았다며 용기를 주시고 세상의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며 격려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논리가 부족하고 감성만 풍부한 제자에게 요즘같이 분석적 글쓰기 풍토에서 사람 냄새 물씬 나는 글은 연속극 한 편 보는 것이나 영화 한 편, 책 한 권 읽어서 얻을 수 있는 감동과 비슷하다며 자존감을 높여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자격지심 많은 제자를 ‘밀리언 달러 베이비’로 대해 주시는 선생님을 떠올리며 저 또한 가르치는 제자들을 더욱 귀하게 여기려 노력하게 됩니다.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백발의 권투 트레이너는 가난한 웨이트리스에게 혹독하게 가르치며 끈끈하고 묵직한 유대를 맺게 됩니다. 31살의 촌뜨기 여자가 권투를 배우겠다고 나서는 꼴이 마흔 넘어 다시 공부하겠다고 나섰던 제 모습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나 자신부터 보호하라”며 끊임없이 외쳐대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말은 선생님께서 주변사람들로부터 저를 보호하도록 힘을 주시던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영화에 ‘모쿠슈라’라는 아일랜드 말이 나옵니다. ‘연인보다도 더 가깝고 깊은 혈육과 같은 존재’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혈육이란 부담스럽다고 금방 내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실수한다고 해서 무한정 소원할 수 있는 관계도 아니지요.
선생님께서 그런 혈육과 같은 존재로 저를 인정해 주시고 성장시켜 주신 덕분에 저 같은 사람도 선생의 자격으로 제자 일이라면 유난을 떨고 호되게 꾸짖을 줄도 아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물보다 피가 진하다고들 하지만 물도 정들면 피보다 낫다는 실감을 종종 하며 살게 되었지 뭡니까.
선생님, 강녕(康寧)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오래오래 선생님의 특별하고 그윽한 그늘 아래서 모쿠슈라로 머물며 삶이 힘들고 어렵게 느껴질 때면 어리광도 부리고 따끔한 충고의 말씀도 들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감히 말씀드립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뜻밖의 순간에 행운처럼 소중한 사람을 만난다는 뜻이라면 오히려 선생님이 저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이십니다. 여름 보양식 으뜸은 민어라고 합니다. 선생님, 뽀얗게 우러나는 민어지리탕 한 그릇 대접할 꼭 기회를 주십시오. 샬롬!
김애옥 동아방송예술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