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수강과목 ‘물밑거래 성행’… 취업난 학점경쟁 애환 반영

입력 2010-09-03 20:36


“벤처경영론-조직행동론 맞바꿀 분”-“외환시장론·자원경제학 팝니다”

“‘20세기 한국사’와 ‘재즈음악의 이해’ 맞교환 원해요. 원하시면 ‘화요일 9시 태권도’나 ‘월요일 9시 한국어 문화의 이해’ 끼워드립니다.”(서울 K대 인터넷 홈페이지 자유게시판)

경품행사 광고 같지만 새 학기 수강과목을 거래하자는 내용이다. 여름방학 동안 1차 수강신청을 마친 각 대학은 학기 초 학생들이 일부 과목을 취소하거나 새롭게 신청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인터넷 사이트 ‘디시인사이드’의 서울 S대 게시판에는 ‘벤처경영론 필요하다. 소비자행동론이나 조직행동론과 바꿀 사람을 찾는다’는 글이 처음 올라온 지난달 말부터 비슷한 요청이 줄을 잇고 있다.

최근 가을학기를 시작한 대학가에서 벌어지는 ‘수강과목 물밑거래’ 현상이다. 수강신청 기간에 원하는 과목을 신청하지 못한 학생들은 정정 기간 동안 학교 홈페이지나 인터넷 게시판에서 수강과목을 거래하고 있다. 각자 선점해 둔 과목을 맞바꾸거나 현금 등을 지불하고 특정 과목을 사들이는 식이다.

거래 방식은 가지가지다. 맞교환뿐 아니라 한 과목을 얻는 대신 둘 이상의 과목을 내주는 끼워 팔기도 빈번하다. 바꿔주는 학생은 선호도가 높은 과목일수록 높은 가격 등 유리한 조건으로 거래할 수 있다. 디시인사이드 서울의 또 다른 S대 게시판에는 ‘외환시장론, 자원경제학, 도시경제학 팝니다. 5000원’ 등의 글이 올라와 있다. 자신이 신청해 둔 3개 과목을 현금 5000원씩에 팔겠다는 뜻이다. 이밖에 ‘사례는 확실하다’ ‘무엇으로든 보답하겠다’ 같은 사족은 대가가 오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수강과목을 교환하는 방법은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한다. 거래 당사자들은 ‘오후 1시13분’ ‘오후 4시49분’처럼 애매한 시각 컴퓨터가 있는 특정 장소에서 만나자는 지령을 주고받는다. 인기 과목은 노리는 사람이 많아 타이밍을 못 맞추면 엉뚱한 사람이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거래하는 학생끼리 정식 변경 기간이 아닌 시기에 수강신청 사이트를 열어 달라고 학교 측에 부탁하기도 한다.

이런 거래는 취업난과 학점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는 대학생들의 애환을 반영한다. 학생 대부분은 학점에 후하고 과제가 적어 취업 준비나 영어 공부에 지장을 받지 않는 과목을 선호한다. 이들 과목은 저마다 수강 인원이 제한돼 있는 데다 수강신청 시작 단 몇 분 만에 마감될 정도로 인기가 좋다.

수강과목 거래를 보는 학생들의 시각은 갈린다. S대 경영학과 4학년 신모(28)씨는 “자신들의 편의를 반영한 합리적 방식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나 K대 간호학과 2학년 박모(21·여)씨는 “수강과목까지 사고파는 행태는 너무하다”며 “대학가에 시장논리가 침범한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한 대학 관계자는 “돈을 주고 과목을 사고파는 경우는 제재를 검토해 보겠지만 학생들이 개인적으로 수강과목을 맞바꾸는 것까지 학교에서 일일이 제재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김수현 기자 siemp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