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반주 피아니스트의 길 가는 이근아씨 신앙과 음악
입력 2010-09-03 12:02
전 세계 어디나 교회라면 반드시 있는 직책은? 목사 그리고 피아노 반주자다. 우리나라만 쳐도 6만 교회에 최소 6만명이 피아노(또는 오르간) 반주자로 사역하고 있는 셈이다. 예배건 성가대 연습이건 이들이 없으면 진행이 안 될 만큼 꼭 필요하지만 늘 그 자리에 있어서 종종 귀중함을 잊게 되기도 한다. 화려한 무대에서 마음껏 독주를 펼치는 솔로 피아니스트와 비교하면 이름도 빛도 없는 역할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열 살 때부터 교회에서 반주를 해온 것이 지금 세계 최고를 향해 당당히 달려가는 밑바탕이 됐다고 말하는 피아니스트,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린더만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 소속 이근아(35)씨다.
지난달 31일 잠시 한국을 찾은 이씨를 서울 명일동에서 만났다. 사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어떤 일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미국 줄리아드 음대에서 매년 500여명 중 5∼6명만 뽑힌다는 ‘아티스트 디플로마’(최고 연주자)에 2007년 선발됐고, 이 과정 가운데 미국 이민국이 재능을 인정해 이례적으로 영주권을 부여했다는 정도의 정보만 있었다.
‘반주 전문 피아니스트’라는 직업이 낯설다고 솔직하게 말하자 그는 밝게 웃으며 “그러실 거예요”라고 답했다.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니까요. 쉽게 말해서 성악가가 공연할 때 보면 반주자가 함께 무대에 오르잖아요? 반주자는 성악가와 일정 기간 함께 연습을 했겠죠? 그러면서 성악가의 음정과 발음 등을 교정해 줬을 테고요. 전 ‘린더만 영 아티스트 프로그램’ 소속 연주자들에게 그런 존재예요.”
물론 한국에도 반주 피아니스트들이 있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반주뿐 아니라 ‘코치’로서의 역할 비중이 크다. 때문에 전공자도 많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유명 반주자들도 존재한다. 능력에 따라 활동 범위가 무궁무진하게 넓어지기도 한다. 그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줄리아드 음대 오케스트라 등에서 오디션 반주, 연습 코치 등으로 활약하고 있다.
현재 그가 일하는 뉴욕에는 동양인이나 여성 반주자가 거의 없다. ‘한국인 여성 반주자’는 특히 드물다. “연주자 지휘자와의 원활한 소통, 인간관계가 중요하고 상대의 상황에 맞춰 융통성 있게 연주하는 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하는 이씨에게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능력을 갖출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교회 성가대 반주 덕분”이라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대학원 때까지 15년 넘게 성가대와 예배 반주를 줄기차게 했어요. 그러다 보니 귀가 많이 발달했어요, 특히 초등부 때 지휘자 선생님은 아이들 목소리에 맞게 키를 계속 바꿔가며 연주하게 하셨어요. 아주 좋은 공부가 됐죠.”
그밖에도 “시간관념과 책임감이 커졌고, 사교성도 좋아졌고…” 등 성가대 예찬론이 한참 이어졌다. 덧붙여 그는 “뉴욕에서 만난 반주자 대부분이 어려서 교회 성가대 경험이 있더라”고 전했다.
그뿐 아니라 지금의 길을 걷기까지 신앙과 교회 활동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그의 가족은 그가 일곱 살이던 1981년, 아파트 상가교회 시절부터 명성교회에 다녔다. 성악을 전공한 어머니를 비롯해 온 가족이 교회 성가대에서 활동했다. 가족처럼 지냈던 김삼환 목사는 어린 이씨에게 늘 “너는 꼭 음악가가 되거라”라고 말했다.
“학교에서보다, 입시 준비를 위해서보다, 교회에서 연주한 양이 수십 배는 많을 거예요. 부모님께서도 교회 활동에 대해서는 전적인 자유를 주셨으니까요. 늘 즐거운 마음으로 연주하다 보니 자연히 피아노가 제 인생이 된 거죠.”
흔치 않은 반주 피아노의 길을 정할 때는 고민도 됐지만 하나님께 더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과감하게 결정했다.
고비도 있었다. 2000년쯤 미국에 건너갔을 때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 한 달 만에 귀국해야 했다. 병원에 입원해 “유학이고 피아니스트고 다 끝났구나”라고 절망할 때 김 목사가 찾아와 “근아야, 너는 피아노를 쳐야 산다. 하나님이 주신 그 재능을 꼭 잡아라”라며 기도를 해 줬다. 그러자 기적처럼 건강이 급속도로 회복됐다.
그 뒤 그는 “기왕이면 제대로 유학을 가자”는 마음에 어려서부터 꿈꾸던 줄리아드 음대를 목표로 다시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 비해 영어공부도 피아노 연습도 몇 배 더 철저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줄리아드에 갔을 때 나이가 28세였다. 스무 살도 안 된 동기들이 “용기가 대단하다”고 하는 치켜세우는 말에 위축되기도 했다. 입이 딱 벌어지도록 재능 있는 연주자들 사이에서 움츠러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까지 남았다.
“줄리아드에서 존경하던 여성 교수님께 물었어요. 어떻게 이 자리에 남으셨냐고. ‘그저 묵묵히 즐기며 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은 다 포기하고 나만 남았더라’고 하셨어요. 저도 그 말대로 된 것 같아요.”
무표정할 때도 웃는 인상이 남아 있는 그의 얼굴을 보니 즐겁게 살아온 것은 분명해 보였다. 미국 현지 장로교회에 출석 중인데 동료들을 여럿 전도해 함께 체임버 연주로 예배 반주를 한다는 이야기, 오페라 코치 역할을 위해 이탈리아어와 독일어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이야기, 다른 동양인 여성의 롤모델이 되기 위해 이 길을 끝까지 가겠다는 다짐 등 어떤 대목에서도 부담스러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오는 10월 뉴욕필 오케스트라 오보에 수석 연주자인 량왕과의 협연을 앞두고서 연습을 위해 4일 출국한다. 마침 출발하는 날까지 진행되는 명성교회 특별새벽기도회에 ‘개근’할 수 있어 기쁘다면서 그는 다시 한 번 활짝 웃어보였다.
황세원 기자 hws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