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고 녹슬어 더 정겨운 간이역 아리랑… 임철우 장편소설 ‘이별하는 골짜기’

입력 2010-09-03 17:31


간이역의 낡은 의자에 앉아본 사람들은 경험하게 된다. 대합실을 오가는 사람들이 문득 과거로부터 불쑥 튀어나온 유령처럼 느껴지는 착시 같은 것 말이다. 시대착오가 그것인데, 같은 공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도 과연 동일한 시간에 살고 있는가 하는 의문은 간이역에 깃들어 있는 불모성의 역사와 맞물릴 수밖에 없다.

장편 ‘이별하는 골짜기’(문학과지성사)는 소설가 임철우(56)가 강원도 정선군에 있는 무인 간이역인 ‘별어곡(別於谷)’을 만난 순간부터 씌여졌다. 최근 몇 해 동안 강원 산간지역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다가 수 년 전 이 역을 발견하고 ‘이별하는 골짜기’라는 이름에 매료됐다고 한다. “도토리 깎지만 한 역사(驛舍) 지붕에 걸린 그 낡은 간판을 보는 순간 가슴속에서 뭔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날 먼지 수북한 대합실 나무 의자에 한참을 홀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작가의 말)

소설은 두 남자와 두 여자의 이야기가 옴니버스영화처럼 펼쳐진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상처를 안고 살아온 별어곡 역 막내 역무원 정동수, 자신의 실수로 열차에 치여 죽은 남자의 아내와 결혼을 하고 결국 상처로 얼룩진 삶을 살게 된 늙은 역무원 신태묵, 날마다 커다란 가방을 끌고 별어곡 역을 찾아와 목적지도 찍히지 않은 기차표를 들고 멍하니 있곤 하는 치매든 할머니, 자신의 삶을 옭아매는 어린 시절의 일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역 주변 제과점 여자 등 네 인물이 주인공이다. 하지만 위안부로 끌려갔던 노파의 이야기 분량이 가장 많다.

“2003년께 전쟁과 평화에 대한 포럼에 토론자로 참여한 적이 있었어요. 그 때 방청석에 있던 한 분이 위안부는 정말 엄청나게 큰 문제인데 왜 이에 대해 다루는 소설이 없느냐는 질문에 당혹스러워했던 기억이 있어 꼭 다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소설은 2006년 ‘문학사상’에 ‘강물편지’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작품이다. 임씨는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대폭적인 수정을 거치고 새로운 내용을 추가했다. “연재 분량에 비하면 300매가 줄었지요. 이렇게 많이 다듬은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위안부 할머니 이야기도 처음에는 다른 인물을 다룬 글과 같은 분량을 맞추려고 했는데 알면 알아 갈수록 그렇게 되지 않더군요.”

70∼80년 전의 이야기인데 현재의 우리와 완전히 분리된 이야기가 아닌 것은 지금은 없어지고 없는 간이역의 이미지와 상통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은 간이역이다. 게다가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서정성은 시인 곽재구(56)의 시 ‘사평역에서’를 연상시킨다.

소설로 쓴 ‘사평역에서’라고나 할까. 작가는 “어렸을 때 섬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기차와 겨울에 내리는 눈에 대한 동경이 강한 것 같다”며 “‘사평역에서’는 시를 지배하는 사진 한 컷 같은 느낌이 드는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별어곡’ 역도 ‘사평역에서’처럼 소설을 지배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