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이∼만큼 가본 적 있습니까?… 꿈같은 실험 2주 집중휴가
입력 2010-09-02 19:38
신한은행 서울 압구정역금융센터에서 근무하는 정영혁 부지점장. 그는 이번 여름휴가 때 히말라야의 고봉 안나푸르나에 다녀왔다. 등산을 좋아하게 되면서 품어왔던 꿈을 이룬 것이다. 8월 2일부터 13일까지 11박12일의 트레킹. 정씨는 안나푸르나의 베이스캠프 설치 지점인 4130m까지 올랐다.
‘2주 휴가’ 권하는 회사들
올 여름 신한은행에는 특별한 휴가 이야기가 많다. 누구는 아들과 함께 전국일주를 했고, 한 지점장은 아프리카 수단에 가서 자원봉사를 했다. 휴가 이야기가 풍성해진 이유는 올해 처음 도입한 2주짜리 집중휴가 때문이다. 지난해 4일에 불과했던 의무 휴가일수를 10일로 늘리면서 2주 휴가를 채택한 것이다. 주말을 합치면 최대 16일까지 연속으로 쉴 수 있다.
8월 말 현재 신한은행 직원 1만3000여명 가운데 3분의 2가 2주 휴가를 다녀왔다. 부서별, 지점별로 휴가가 몰리지 않도록 기간을 조정했고, 1주일씩 두 번 나눠 가는 휴가는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홍보팀 김영길 과장은 “왜 꼭 2주일을 붙여서 소진해야 하느냐는 질문도 있었다”며 “2주 휴가는 한 번도 안 해본 거니까 해보자, 해보고 나서 판단하자, 그렇게 해서 밀어붙였다”고 설명했다.
결과는 꽤나 성공적이다. 직원만족센터 류동우 차장은 “휴가 떠나기 전에는 기간이 너무 길어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직원들도 있었는데, 휴가 다녀와서는 내년에도 또 하느냐고 묻더라”며 “대부분 만족스럽다는 반응이었다”고 전했다.
2주 휴가를 도입하면 휴가 사용률이 높아진다. 그러면 연차휴가 미사용분에 대해 기업이 지급하는 보상비가 준다. 신한은행은 올해 전체 직원 2주 휴가 실시로 지난해에 비해 연가보상비 100억여원이 절약될 것으로 본다. 이렇게 절약된 돈은 고스란히 채용을 늘리는 데 들어간다.
신한은행은 신입사원 채용 규모를 지난해 400명에서 올해 800명으로 늘렸다. 또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피크타임에만 근무하는 계약직 주부사원을 분기별로 200∼300명씩 뽑고 있다. 올해 채용하는 피크타임 주부사원 숫자는 1000명에 달할 전망이다. 김 과장은 “휴가정책만 바꿔도 고용을 늘릴 수 있다”고 말했다.
정유회사인 에쓰오일 직원들도 올해부터 2주짜리 장기휴가를 즐기고 있다. 외국인 최고경영자(CEO)인 아흐메드 에이 수베이 사장은 연초에 전 직원에게 2주 휴가 계획서를 내도록 했고, 임원들부터 솔선해서 2주 휴가를 사용하라고 지시했다.
홍보팀 노시경 차장은 “입사 후 처음 긴 휴가를 가졌다”며 “직원 휴가가 콘도 잡아서 2박3일 가족여행, 동남아 해외여행 등 판에 박힌 듯 똑같았는데, 이번에는 다양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7월 말과 8월 초에 집중됐던 휴가가 올해는 분산됐다. 홍보팀의 경우, 팀원 5명의 휴가 기간이 4월, 5월, 7월, 8월, 10월로 각기 다르다. 휴가가 길다보니 팀원들끼리 기간이 겹치면 안 된다.
에쓰오일의 2주 휴가 실험에서 주목할 것은 대행 체제. 임원이나 팀장(부장)이 휴가를 떠나면 다른 부서 임원이나 팀장이 와서 업무를 대신한다. 지난달 홍보팀장이 휴가를 떠났을 때, 총무팀장이 홍보팀장을 대행했다. 2주간의 대행 경험을 통해 총무팀장은 홍보팀 업무를 대충이나마 알게 됐고, 홍보팀 직원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얻었다. 노 차장은 “휴가자를 대체해서 다른 업무를 수행하다 보면 다양한 경험과 관점을 얻게 된다. 그리고 다른 팀 업무에 대한 이해가 생기고 커뮤니케이션도 훨씬 원활해진다”고 말했다.
이참 관광공사 사장 분투기
GS건설도 올해 건설업계 처음으로 2주 휴가 제도를 시작했다. 목적은 조직문화 혁신. 건설회사 특유의 딱딱한 분위기를 바꾸지 않고는 글로벌 기업이 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회의문화, 보고문화와 함께 휴가문화에 손을 댄 것이다.
올 들어 2주 휴가를 의무화하거나 권장하는 기업이 여럿 생겨났다. 구자영 SK에너지 사장처럼 앞장서서 2주 휴가를 실천하는 CEO도 등장했다. 한국관광문화연구원 이성태 박사는 “아이디어를 중시하는 광고회사와 외국계 기업에서나 볼 수 있었던 선진국형 장기휴가 문화가 대기업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중”이라며 “한국에서도 장기휴가 실험이 본격화됐다”고 말했다. 장기휴가는 리프레시휴가, 집중휴가, 안식휴가, 아이디어휴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국내에서 2주 휴가 얘기를 공론화한 인물은 독일 출신 귀화한국인 이참씨다. 그는 지난해 한국관광공사 사장으로 부임하면서 2주 휴가 실험에 나섰다. “이제 한국도 유럽처럼 장기휴가를 즐길 때가 됐다”는 그의 말은 꽤나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지난 연말에는 전체 직원들에게 2010년부터 2주 휴가를 가라고 지시했고, 자신이 먼저 2주 휴가를 쓰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이 사장은 2주 휴가를 쓰지 못했다. 천안함 사태가 터져 5월 예정했던 휴가를 취소했기 때문이다. 이 사장은 지난 7월 초 서해안으로 1주일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관광공사는 2주 휴가 실시 여부를 직원평가에 반영토록 하고 있다. 그러나 올 들어 겨우 5명만 2주 휴가를 썼다. 왜 이렇게 됐을까? 홍보실 강옥희 실장은 “의무가 아니라 자율에 맡기다 보니 잘 안 된다”며 “사장이 휴가를 쓰라고 하도 강조하니까 휴가 사용률은 지난해보다 크게 늘었다. 그런데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지 2주 휴가를 쓰는 것은 아직도 꺼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10월 말 다시 2주 휴가를 떠날 작정이다. 직원들의 2주 휴가 사용도 독려하고 있다. 왜 그토록 2주 휴가에 매달리는 것일까?
“올해 한국 근로자들이 여름휴가로 평균 4.1일을 썼다고 해요. 그거 가지고 무슨 관광산업이 되겠어요? 독일 프랑스 미국 등 관광 선진국들의 경쟁력은 장기휴가 문화의 토대 위에서 나온 거예요. 우리나라는 참 좋은 곳이 많은데 다들 아침에 왔다가 저녁에 가요. 머무는 관광이 돼야 휴가문화가 성숙해지고 관광 인프라도 생기는데, 시간이 부족하니까 머물 수가 없는 거죠. 사실 2주 휴가로도 부족해요. 유럽은 보통 3주씩, 4주씩 휴가를 가잖아요.”
이 사장은 휴가는 생산적인 활동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기성세대는 아직도 휴가를 길게 쓰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 같아요.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바쁘고 파워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대통령도 1년에 몇 번씩 휴가를 가고, 2주 휴가도 즐기잖아요. 어떤 일을 잘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고, 순발력이나 창의력도 필요해요. 그걸 만드는 시간이 바로 휴가예요.”
“휴가개혁은 일종의 혁명”
대다수 한국 직장인에게 2주 휴가는 여전히 꿈같은 일이다. 중소기업들은 1주 휴가도 주지 못하는 곳이 수두룩하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행정안전부가 공동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지난해 공휴일과 연차휴가를 포함해 평균 15.6일을 휴일로 사용했다. 공휴일을 빼면 실제 연차휴가 사용은 7.6일에 불과하다. 직장생활을 10년 하면 19일의 연차가 주어지는데, 절반도 못 쓰는 것이다.
한국의 노동시간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매년 발표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2008년 한국 노동자들의 평균 노동시간은 2256시간으로 압도적인 1위다. OECD 평균은 1764시간. 한국은 2000시간을 넘는 유일한 OECD 국가이기도 하다.
이성태 박사는 “우리나라는 2004년 주 5일제를 도입했지만 공휴일이 워낙 적고 휴가 사용률이 낮기 때문에 연간 근무시간이 2100∼2300시간에 이른다”며 “국내에서는 휴일이 늘면 휴일 근무수당 등 기업 비용이 증가한다는 논리가 우세하지만, 외국에서는 휴가가 늘면 민간 소비가 늘고 기업 매출이 올라간다는 편익을 중시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와 쌍벽을 이루는 ‘일 중독 국가’ 일본도 2000년대 들어 휴일 개혁에 나섰다. ‘해피 먼데이’ 제도를 통해 당초 날짜가 고정돼 있던 ‘체육의 날’ 등 4개 국경일을 월요일로 옮겨 국경일이 휴일과 겹치지 않도록 했다. 또 봄과 가을에 각각 5일 연휴를 누릴 수 있게 국경일 날짜를 조정하는 것을 골자로 한 ‘국경일법 개정안’이 현재 국회에 상정돼 있다. 둘 다 목적은 같다. 내수경기 활성화. 휴가정책이 효과적인 경제 활성화 대책이라는 것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상식이다.
휴가는 고용과도 연관된다. 2주 휴가 전면 실시를 통해 올 한 해 신한은행이 만들어낸 고용 창출 효과가 작지 않다. 만약 금융권 전체가 동참한다면 상당한 규모의 신규 고용을 일으킬 수 있다.
“휴가를 바꾸는 것은 일종의 혁명이에요, 혁명.”
이참 사장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