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한 사회’ 드라마판엔 없다

입력 2010-09-02 18:11


계급사회다. 배우들은 크게 네 부류로 나뉜다. 하루 3만6000∼4만원을 받는 엑스트라, 대사가 있는 단역과 조연, 출연료 상한제(1회 1500만원)를 적용받는 주연배우, 출연료 상한제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한류스타. 가장 많은 이들이 차지하는 단역·조연 계급은 또다시 6∼18등급으로 갈라진다. 몇 등급에 속하는지는 방송사와 해당 배우만 안다. 등급을 매기는 주체는 방송국이다. 조·단역 배우들은 계급에 따라 60분 미니시리즈 한 편당 35만2830∼152만2580원, 30분 일일드라마는 11만2710∼48만6380원을 받는다. 싸구려 삼겹살보다 더 얇고 잘게 쪼개진 등급이 부여된다. 18등급이 가장 높은 계급이지만 무조건 좋은 것만도 아니다. 방송사나 제작사는 인기 없는 18등급보다 값싸고 일 잘하는 15등급을 선호하는 경우도 많다. 이럴 때는 ‘고학력 실업자’들이 학력을 속여서라도 일자리를 찾는 것처럼 배우들도 등급을 낮추고 싶어 한다.

대다수 배우들은 가난하다. 한국방송영화공연예술인노동조합(한예조)에 따르면 지난해 탤런트, 성우, 코미디언, 무술연기자의 71.9%가 1년 소득 1000만원 이하로 조사됐다. 방송계에서 먹이사슬은 상층부인 방송사와 스타, 중간층인 외주 제작사와 기획사, 하층부인 조·단역과 엑스트라 배우로 갈린다. 가장 연약한 이들은 강인한 개체로부터 착취당하기 마련이다. 방송계도 그렇다. 현재 일을 하고도 출연료를 받지 못한 배우는 400여명. 이들이 방송3사 드라마 외주 제작사로부터 받지 못한 금액은 43억6800만원에 이르렀고 급기야 1일 촬영 거부를 선언했다. 이들은 왜 카메라를 떠나려 할까.

먹이사슬의 하류층, 배우

KBS 공채 15기 탤런트 김원배(55)씨도 출연료 300여만원을 떼였다. KBS 2TV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에 간혹 출연하던 그는 지난 5∼6월 KBS 2TV ‘국가가 부른다’에서 단역인 변호사로 캐스팅됐다.

“KBS에서 하는 드라마인데 누가 출연료 못 받을 거라 생각했겠어요? 4회 출연했는데 막상 끝나니까 돈을 안 줘요. 처음에는 한 푼도 못 받다가 계속 달라고 했더니 뒤늦게 600여만원 중에서 270만원만 줍디다.” 밤무대 업소에서 노래를 부르던 김씨는 요즘 그마저도 그만둬야 했다. 생활이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김씨와 달리 주연 배우들은 돈 떼일 염려가 없다. 주연은 대부분 선불을 받고서야 촬영에 들어간다. 제작사는 1회당 1000만원을 훌쩍 넘는 주연의 몸값을 지불한 뒤 촬영에 필요한 각종 경비에 돈을 쓴다. 예산은 언제나 빠듯하고 돈은 모자란다. 그렇게 생긴 적자는 조·단역 배우들의 피해로 돌아간다. 출연료 미지급이다.

먹이사슬에서 조·단역의 아래층에 있는 엑스트라들은 5000원 남짓한 밥값마저 떼이곤 한다. 2008년 8월 16일 영화 ‘미인도’를 촬영할 때도 그랬다. 이날 주연 여배우 김규리는 생일을 맞아 엑스트라와 스태프들에게 햄버거와 음료수를 돌렸다. 그러나 P기획사는 이를 빌미로 엑스트라 120명에게 점심을 제공하지 않았다. 식사를 제공하지 않을 경우 5000원을 현금으로 지급하도록 약속한 출연계약을 어긴 것이다.

“왜 밥을 안 줍니까?”

“햄버거 드렸습니다.”

“그건 김규리씨가 우리들한테 선물한 거잖아요. 여기 봐요. 햄버거 담은 봉투에 김규리 사진 안 보여요?” 엑스트라를 통솔하는 기획사 현장 반장은 묵묵부답이었다. 끼니를 햄버거로 대신한 엑스트라들은 일당이라도 받기 위해 다음날까지 경기도 양수리 촬영소에서 군말 없이 출연을 이어갔다.

“이조시대에 사냐, 별나라에서 왔냐. 제가 엑스트라들이 이렇게 산다고 설명하면 ‘요즘 식당이나 공사판에서도 노동자들한테 그렇게 안 한다’면서 믿지를 않아요. 다들 21세기에 사는데 우리만 1970년대에 있는 거죠.” 문계순(55·여) 전국보조출연자노동조합 위원장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엑스트라는 주로 지방에서 1박2일간 촬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야간, 철야 수당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 엑스트라 배우 공급업체인 T기획사에 연락을 했다. 엑스트라 업계에서 4대 회사에 속하는 이곳은 방송장비 조작원 파견업으로 근로자파견사업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방송국에 엑스트라를 공급하는 것이 주 수입원이다.

“연장, 야간, 철야 수당을 50∼200% 지급키로 임금 협약서를 체결한 뒤에도 지키지 않는 이유는?” “출연한 날로부터 두 달 뒤에야 출연료를 주는 까닭은?” “엑스트라가 아닌 방송장비 조작원 파견 허가를 받은 것은 출연자들에게 제공해야 할 4대 보험 혜택을 피하기 위해서인가?”

이 모든 질문에 기획사는 한 가지로 대답했다. “방송국이 돈을 늦게 주고 야간 수당을 주지 않는다. 방송국이 엑스트라를 노동자로 보지 않기 때문에 방송장비 조작원에 한해 근로자파견사업 허가를 받았다.”

지상파 방송 3사는 펄쩍 뛰었다. “야간, 철야 수당을 비롯한 출연료는 방송 출연한 다음달 중순 또는 하순에 지급한다”는 것이 공통적인 대답이었다. 그러나 엑스트라들의 처우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SBS 드라마센터 관계자는 “기획사에 큰 문제가 있었으면 이제껏 수십년간 방송국과 계약이 지속될 수 있었겠느냐?”고 되물었다.

욕설과 구타에서도 이들은 자유롭지 않다. “6월 말 강원도 영월군에서 군복 입고 뛰는 장면을 찍었는데 H기획사 실장이 제 옆에 있는 출연자 가슴을 워커(군화)로 세게 찼어요. 빨리빨리 안 움직인다고. 주위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일으켜 세워 줬는데 아파서 한동안 숨을 제대로 못 쉬고 헉헉거리는 거예요.” 엑스트라 이모(37)씨는 현대극보다 사극, 시대극 촬영 현장이 험악하다고 전했다.

먹이사슬 중간층인 제작사도 돈이 없다.

방송 3사는 지난해 1677억원 순이익을 기록했다. MBC 746억원, KBS 693억원, SBS 238억원 순이다. 그런데 연기자들은 왜 출연료를 받지 못할까. 방송국이 제작비가 적은 아침드라마와 일일드라마를 제외한 대다수 미니시리즈를 외주 제작사에 맡기는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미니시리즈의 1회 제작비는 1억5000만∼2억원. 하지만 방송국은 외주 제작사에 제작비의 50∼60%를 지급한다. 외주 제작사는 간접 광고와 후원, 해외 판매로 차액을 메워야 한다.

“누가 드라마에 자막만 깔아준다고 제작 지원합니까? 그럼 PPL(간접광고)해야 하는데 요즘 대기업 간접광고 따는 것도 힘들어요. 간접 광고로 받는 돈 많아야 5억원입니다. 또 간접광고 노골적으로 하면 방송통신위원회에서 제재하죠. 그럼 답은 해외 판권으로 돈 받는 것뿐이에요. 이것도 보통 방송국과 외주 제작사가 6대 4로 이익을 나눠요. 방통위도 문제예요. 외주랑 방송사랑 만날 돈 때문에 싸우면 레드카드든, 옐로카드든 꺼내서 해결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현장에 2주만 나와 보라 해요.”

MBC ‘태왕사신기’ 등을 제작한 김종학 프로덕션 박창식 대표가 열을 내며 말했다. 그나마 김종학 프로덕션처럼 한국드라마제작사협회에 가입된 30여개 제작사는 상황이 괜찮은 편이다.

협회에 가입하지 않은 신생 제작사는 드라마 1편을 제작하고 빚을 감당하지 못해 도산하거나 유명무실한 회사가 된다. 지난해 MBC ‘2009 외인구단’을 제작한 그린시티픽쳐스도 그런 경우다. 그린시티픽쳐스 측은 “MBC가 일본에 ‘2009 외인구단’ DVD를 일방적으로 유출했다. 그 때문에 해외 수입을 거의 올리지 못해 배우 출연료 5억3500만원도 주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애초에 일본 시장을 겨냥했던 이 회사는 일본 캐나다 미국에서 저작권을 갖는 대가로 1회당 제작비 4억3000만원 중 3억7000만원을 부담했다. 그러나 MBC의 DVD 유출로 일본의 한 콘텐츠 회사와 39억원에 드라마를 수출키로 계약한 성과는 물거품이 됐다고 한다. 금세 일본에선 불법 DVD가 나돌았고, 일본 회사들도 MBC가 저작권을 가진 것 아니냐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저 행정적 실수랍니다. 방송국에서 미안하단 사과도 안 해요. 그럼 제가 예전에 프로듀서로 참여했던 ‘태왕사신기’는 왜 불법 유출이 안 된 거냐고 따졌어요. 그랬더니 ‘태왕사신기’는 한류 스타 배용준이 있어서 조심했대요. 이게 말이 됩니까? 대한민국 어떤 권력이 방송국을 이길 수 있나요? (우리가 제작비 부담하기 위해 대출한 돈의) 한 달 이자만 2000만원입니다. 어떻게든 빚을 갚아야죠. 저희도 출연자들에게 미안할 따름입니다.”(그린시티픽쳐스 이경석 총괄프로듀서)

MBC 홍보팀은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며 말을 아꼈다. 해외사업부 담당자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린시티픽쳐스는 뒤늦게 일본 후지TV의 케이블채널과 ‘2009 외인구단’ 수출 계약을 맺었다. 지난 3월부터 방영된 ‘스트라이크 러브’(‘2009 외인구단’의 일본 제목)는 이 채널이 방송한 한국 드라마 중 ‘선덕여왕’ ‘바람의 나라’ 등을 제치고 줄곧 시청률 1위를 달렸다.

방송사가 스타 작가, 유명 배우 확보 여부에 따라 외주 제작사에 편성권을 주는 것도 부실 제작사를 키우는 요인이다. 한류 스타의 경우 출연료는 1회당 1억원을 훌쩍 넘는다. 그러나 스타 몸값도 사실상 방송사와 외주 제작사가 올려놓은 것이다. 2007년부터 한류 붐을 타고 외주 제작사가 우후죽순 생겨났고, 웃돈을 얹어서라도 한류 스타를 잡는 데 경쟁이 붙었다. 과다 경쟁은 결국 외주 제작사의 부실로, 방송계 먹이사슬의 가장 하층인 조·단역 배우들의 고통으로 돌아갔다.

제작비 현실화, 스타 몸값 낮추기, 방송사의 출연료 지급 보증, 부실 외주 제작사의 방송사 진입 금지가 해법이란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허웅 SBS 드라마국장은 “스타 캐스팅이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방송사가 외주 제작사에 강요한 적이 없다. 제작비란 언제나 모자라기 마련이고, 외주 제작사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선을 그었다. 다만 KBS와 SBS는 출연료 미지급을 책임지겠다고 밝혀 배우들의 촬영 거부 사태만은 막았다. 방송 3사 중 출연료 미지급 금액이 21억6000여만원으로 가장 많은 MBC는 협상 테이블에 나오지 않았다. 이에 따라 연기자 배두나 이천희 서지석 소이현이 주연을 맡고 있는 MBC 주말 드라마 ‘글로리아’는 2일 오후 3시부터 촬영 거부에 돌입했다.

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