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진의 이건 뭐야?] 빼앗긴 골목에도 봄은 오는가

입력 2010-09-02 17:57


재작년 이맘때까지 살던 곳은 골목 중 골목이었다. 서울 옥수동 재개발 제12구역. 집이 붙어 있을 수 없겠다 싶은 골목의 모서리 끝까지 집이 붙어 있고, 여기까지 방이 붙어 있을 수 없겠다 싶은 집의 모서리까지 악착같이 방을 붙여 놓은 그런 집이 다닥다닥 벌집처럼 모여 있었다. 그곳에서 피어나는 나팔꽃들은 서울특별시에서 태양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서, 방 위에 방이, 또 그 방 위에 옥탑방이 얹혀 있는 집과 집을 어지럽게 가로지르는 낡은 파이프를 둘둘 감고 위세 좋게 하늘로, 하늘로 자꾸 올라갔다.

마고자를 고풍스럽게 차려 입은 어르신이 몇이나 혼자 사셨지만 그들은 혼자 살았으되 독거노인은 아니었다. 버려진 리놀륨 장판을 몇 겹 깔아 만든 안락한 돗자리나, 나무판자나 장롱 문짝을 잇대 만든 평상은 골목 커뮤니티의 핵이었다. 해가 뜨면 서둘러 나와 앉아 있던 할머니 한 분이 정오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자 모두 그 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경찰이 온 다음, 구급차가 와서 전날 밤 노환으로 임종한 할머니의 시신을 실어갔다. 그렇게, 죽음은 자신이 할머니에게 한 일을 골목을 상대로 12시간도 감추지 못했다.

흔히 골목은 으슥하고, 으슥한 곳에서는 범죄가 잘 일어난다는 것이 세간의 생각이지만 골목 안 방앗간 집 할머니의 생각은 이랬다. 그런 골목은 사는 사람들이 서로 몰라서 으슥해지는 것이다. 못된 짓은 서로가 모를 때 일어난단다. 이 골목에서는 누가 어디 살고 무엇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단다. 그러나 골목이 있던 자리를 메우는 스타벅스니 무슨 체인이니 하는 곳에 앉아 있을 때 우리는 서로를 전혀 알지 못한다. 구멍가게 앞 평상에서 캔커피를 사서 마시며 이야기할 때 우리가 낸 돈은 골목으로 되돌아가지만 스타벅스에서 우리가 낸 4000원이 어디로 돌아가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골목이 없으니 평상도 없고, 4000원이라도 내야 우리는 교제할 수 있다. 소비 없이는 교제도 없다.

돈을 쓰지 않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만나려 할 때 당연히 주머니에 돈을 채워 가야 한다는 게 상식이다. 이것은 100년 전에도 상식이었을까. 그렇다면 돈이 없던 시절에, 혹은 우리 증조할머니나 증조할아버지들은, 그 윗대의 사람들은, 누구를 어디에서 어떻게 만났단 말인가. 돈이 없이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하기만 한 이야기일까.

골목이 추방되면서 대도시는 점점 효율적 공간이 돼간다. 그리고 잉여공간은 질식하듯 사라지고, 효율적이지 못한 인간과 소비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는 인간 역시 갈 곳이 없다. 두어 시간 대화하는데 4000원도 내지 못할 사람들은 어디 걸터앉을 자리도 없다.

골목이 추방되면서, 우리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우리에게서 추방됐다. 삼성이 용산 재개발 사업에서 손을 뗐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그러나 골목은 우리에게 쉽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도시는 주머니에 4000원쯤 없이는 친구 사귈 엄두도 낼 수 없는 곳이 돼가고, 누구도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죽을지언정 ‘루저’가 될 수는 없으니까.

김현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