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원, 43일간 외국돌며 200편 … 영화는 중독이다

입력 2010-09-02 18:01


영화 보는 건 영화제 프로그래머의 일이다. 영화감상이 직업인 사람이야 여럿 있지만, 많이 보기로는 프로그래머가 으뜸이다.

부산국제영화제 ‘월드영화’ 담당 5년차 프로그래머 이수원(39)씨는 그중에서도 대한민국에서 몇 손가락에 꼽을 만하다. 한국 아시아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제작된 영화 가운데 부산에 초청할 물건을 찾는 게 그녀의 임무다.

올해로 15회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10월 7∼15일)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폭염이 여전한 지난달 31일 부산 해운대. 조직위원회가 입주한 높이 2m 남짓 컨테이너 가건물은 긴장과 흥분으로 술렁댔다. 영화제를 코앞에 두고 누군가의 일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씨 업무의 9할은 이미 끝이 났다.

보고 또 보고

이씨는 여름을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영화 보며 지냈다. 이 말이 주는 낭만적 울림에 속아선 안 된다. 이씨의 여름투어는 한 달 반의 강행군이다. 올해 일정은 6월 27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출발해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로마를 찍고 다시 파리와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을 돌아 8월 11일 스위스 로카르노에서 마무리됐다. 한국에 들른 사흘을 빼고 꼬박 43일. 그가 한 일은 영화를 보고, 또 영화를 보고, 계속 영화를 본 것밖에 없었다. 관광? 엄두도 못 낼 사정은 이랬다.

여름 출장의 주목적은 프로그래머를 위한 개인 시사회를 뜻하는 ‘프라이빗 스크리닝(private screening)’이다. 마드리드, 파리, 로마에서 1주일씩이다. 세 나라 영화진흥기구가 추천하는 영화들을 직접 보고 부산에 초청할 작품을 골라낸다. 세 도시를 굳이 6∼8월에 몰아서 방문하는 이유는 타이밍이다. 10월 부산영화제에서 유럽 최신작을 소개하려면, 봄은 이르고 9월은 늦다. 막 후반 작업을 끝낸, 따끈따끈한 신작은 7월에 많았다.

스케줄은 살인적이다. 오전 9시∼9시30분 시작한 시사는 점심을 샌드위치로 때워가며 9∼10시간씩 이어지곤 했다. 7∼8편을 내쳐 보고 호텔에 돌아오면 제작사가 보낸 신작 DVD 10∼20편이 쌓여 있다. 방에 앉아 눈 비벼 가며 노트북으로 또 영화를 본다. 그렇게 출장길 하루에 감상하는 영화가 10편 안팎. 도시마다 50편씩, 프라이빗 스크리닝을 통해 150편을 소화하는 셈이다.

다음은 영화제. 이씨가 유럽에 있는 7∼8월에는 파리시네마와 더반영화제, 로카르노영화제가 열린다. 여름이 대목이긴 하지만 부산영화제 농사가 여름에만 달린 건 아니다. 상반기에도 ‘필참’ 영화제는 줄줄이 포진해 있다. 1월 로테르담국제영화제, 2월 베를린국제영화제·페스파코영화제·헝가리필름위크, 3월 과달라하라영화제, 5월 칸영화제.

월드영화 담당 프로그래머 3명이 이 영화제들을 나눠서 참석한다. 여기에 홈페이지를 통해 공식 접수되는 장·단편 출품작까지 셈하면 비로소 1년간 이씨가 ‘해치우는’ 영화목록이 완성된다. “1년에 영화제와 프라이빗 스크리닝으로 250편, 공식 출품작은 200편 정도를 보니까 1년에 영화를 450편은 보는 것 같네요.”

꽤 오래 전 개봉영화 4편을 내리 관람한 날, 교도소 탈주범이 애인을 찾아 시공을 넘나드는 미심쩍은 꿈에 밤새 시달린 기억이 났다. 인간 두뇌가 하루에 영화 10편을 감당한다는 게 대체 가당키나 한 일인가. 게다가 짧은 영화도 90분은 넘는다. 9∼10시간에 7∼8편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게 노하우죠(웃음). 1시간쯤 보다가 ‘이건 절대 뽑지 않을 영화’라는 느낌이 오면 과감하게 끊고 다음 영화로 넘어갑니다.”

간단한 해법이지만 영화를 보다가 ‘스톱’을 외치게 되기까지 그녀에겐 굉장한 노력이 필요했다. 첫 개인시사 때만 해도 시작하면 끝을 봤다. “그게 영화를 만든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첫날부터 영화가 막 밀리더군요. 마음은 급한데 봐야 할 영화는 쌓이고 끔찍했어요.” 어디서 끊고 어디까지 갈지, 자신의 판단을 믿기까지 몇 년이 걸렸다.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힘든 거요? 글쎄, 연달아 서너 편은, 그쯤은 괜찮아요(웃음). 힘든 건(한참을 생각하더니 덧붙인다), 호텔에 와서까지 DVD 쌓아놓고 봐야 할 때는 몸이 힘들죠. 그래도 좀 자면 돼요. 자는 게 제일 나아요. 영화보기 싫어질 때요? (또 망설인다) 그런 건 없어요. 아, 눈이 아프다든지 그런 때야 있겠죠. 보다가 영화가 너무 형편없어서 이건 도저히 못 보겠다, 그런 경우도 있고. 영화 보기가 싫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 거 같아요.”

되레 영화 보기에는 중독성이 있다고 했다. 금단증상을 동반한 영화 중독은 암만해도 직업병 같았다. “몸은 너무 피곤한데 제가 집에 가면 또 노트북 켜고 DVD 보고 있는 거예요. 그거 중독 맞죠. 2∼3년 전부터는 영화관 가서도 한 편만 보고 나오면 허전해요. 한 편 더 봐야 할 거 같고(웃음).”

발견의 기쁨

프로그래머는 좋은 작품을 알아보지 못하는 게 제일 두렵다. 자신이 놓친 작품이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받는 것. 그건 영화제 프로그래머의 최대 악몽이다. 이씨는 올 칸영화제에서 본 ‘라이프, 어버브 올(Life, Above All)’이란 남아공 작품 얘기를 했다.

“여주인공 연기가 너무 거슬린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봤어요. 주제는 아주 좋은데 연기가 걸린다, 이러면서. 근데 주위 평이 너무 좋은 거예요. 더반영화제에서는 여우주연상까지 탔어요. 나는 별로였는데. 저도 결국 관객이고 취향이란 게 있으니까 (그런 일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주위 의견 듣고 (영화를) 초청했어요.”

좋은 영화를 찾아내는 눈. 사실 프로그래머에게 기댈 건 자신의 감식안뿐이다. 하지만 감식안이란 건 도대체 손에 잡히지 않아서 확신과 불안은 늘 오고간다. 내가 본 게 맞을까, 남들도 비슷할까.

“나쁜 영화가 몇 편 이어지면 ‘어, 왜 이러지. 내 영화 보는 감각이 이상해졌나’ 그런 불안이 생겨요. 그러다가 어떤 영화를 봤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아, 좋은 영화란 이런 거였지. 그 순간, 그 느낌이 너무 좋아요. 결국 좋은 영화는 누구에게나 좋은 것 같아요. 그런 믿음이 있어요.”

지난해 ‘카메룬의 사랑’으로 부산영화제에 초청된 카메룬의 다니엘 캄와 감독. 행사장을 아프리카 전통복장으로 활보한 그는 국내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무명감독이었다.

“영화를 보고 선택한 거죠. 나중에 칸영화제 프로그래머와 얘기해보니까 캄와 감독이 칸에도 초청됐던 분이더군요. 카메룬을 대표하는 감독이었어요. 우린 정말 까맣게 몰랐어요.”

올해 부산영화제에 오는 벨기에 마리옹 안셀 감독 경우도 그랬다. “국내에서는 벨기에 하면 다르덴형제(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두 차례 수상했다)밖에 모르거든요. 저도 그렇고. 영화가 좋아서 안셀 감독을 초청하며 알아보니 벨기에에서는 국민감독으로 불리는 분이더군요.”

명성 대신 영화 한 편으로 고른 감독의 진가를 확인하는 것은 기쁜 일이다. 결국 월드영화 프로그래머의 역할은 잘 닦은 보석으로 국내 영화팬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란 얘기다.

이씨는 파리 유학 시절인 1999년 부산영화제와 인연을 맺었다. 2006년 월드영화 담당 프로그래머로 합류한 뒤 5년째. 본 영화만 1000편이 족히 넘는다. 그런 그가 자주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고 했다. 친구와 함께 개봉영화관에서 한국영화와 할리우드영화를 보는 것이다. “저는 영화를 늘 혼자 보잖아요. 친구랑 같이 수다 떨면서 영화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어요.”

보통 사람은 쉬려고 영화를 본다. 프로그래머는? “나쁜 영화는 더 괴로워지지만(웃음) 좋은 영화는 정말 활력이 돼요. 그게 사실이에요. 그래도 제게 영화가 오락은 아닌 것 같아요. 생각해보면 푹 쉬고 싶을 때 영화를 보는 일은 없는 것 같아요. 영화는 직업정신을 가지고, 열심히 봐야 하니까요.”

부산=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