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정윤희] 모든 길은 책 바깥에
입력 2010-09-02 17:52
빈집을 채우는 것은 다름 아닌 책들이다.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는 대부분 책들이 빈 공간을 메우고 있다. 이곳에서만큼은 책이 주인이며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여인들 같다. 내가 만드는 잡지 ‘출판저널’은 월간으로 발행되기 때문에 한 달 간격으로 새로운 책들이 빈집을 채우고 다시 새로운 책들에게 공간을 내주고 퇴장한다.
책들의 향연은 그렇게 그칠 줄 모르고 피어오른다. 책은 사물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것들은 단순하지 않다. 생존해 있는 저자가 쓴 책도, 100년 전에 살았던 저자가 쓴 책도, 모든 책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다. 들숨과 날숨이 오가는 공간. 책과 함께 살아오면서 호흡하는 것은 사람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잡지사에 몇 달 간격으로 편지가 한 통씩 배달된다. 가지런하게 정자체로 쓴 글씨들이 종이 한 장 빼곡하다. 요즘처럼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나 전자우편으로 서신을 교환하는 시대에 종이 편지는 참으로 생경하게 느껴졌다. 사업에 실패한 후 교도소에 수감돼 있다는 독자인데, 책을 많이 읽고 싶지만 책값이 비싸 사지 못하고 잡지에 담긴 서평들을 읽으면서 독서의 즐거움을 누린다는 것이다. 서평을 읽으면서 앞으로 살아갈 길을 모색하고 자신의 죄를 참회한다는 것이 편지의 주된 내용이다.
편지를 읽으면서 책이 가진 생명력을 다시 생각해 본다. 그래서일까. 내 책상에 일렬로 서 있는 책들 중에서 프리모 레비가 쓴 자전적 장편소설인 ‘지금이 아니면 언제?’가 눈에 들어왔다.
레비는 1943년에 이탈리아 반파시즘 레지스탕스 빨치산 부대에서 투쟁하다가 체포돼 아우슈비츠에 강제 수용된 작가이자 화학자이다. 1982년에 출간된 이 책은 최근 우리나라에 번역돼 출간됐다. 저자는 아우슈비츠에서 나와 고국으로 돌아오기까지 8개월 동안 난민으로 떠돌았던 슬픈 기억들을 소설화했다.
소설의 제목은 로마제국시대에 집대성된 랍비들의 잠언인 “내가 나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살아줄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산다면 과연 나의 존재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길이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에서 따온 것이다. 레비는 책에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것은 “고전과 교양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편지를 보내오는 독자는 분명 책이 가진 생명력을 믿는 것이리라. 책과 소통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하는 그가 책을 덮은 후에도 흔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흔히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지만 “모든 길은 책 바깥에 있다”고 말하는 레비의 음성이 내 귓가를 울린다. 독서의 계절 가을이다. 나의 빈집을 책들이 메우기 시작한다.
정윤희(출판저널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