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회 말석에 물러앉은 청와대 비서실장… 광주광역시 구의원 이병완

입력 2010-09-02 12:40


1일 광주광역시 서구의회 의원 간담회가 열렸다. 추석 전 양로원과 사회복지시설을 누가, 언제 방문할 것인지를 논의하기 위해서다.

상임위원회별로 조를 짰고 찾아갈 시설을 정했다. 구의회엔 교섭단체, 원내대표 같은 창구가 없다. 자연스레 의원 간담회가 주요 의사결정기구가 된다. 1∼2주에 한 번씩, 필요할 때마다 의회 사무국에서 연락을 한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모든 의원이 참석하는데 이병완(56) 의원은 못 갔다. 지난달 28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열린 고 노무현 대통령 탄생 64주년 음악회 참석차 광주를 비웠기 때문이다.

기초의원 두 달 동안

6월 2일 지방선거가 끝나고 보름쯤 지나서 당선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광주 서구 의회 사무국이 주최한 오리엔테이션이었다. 당선자들은 한 명씩 소감을 밝혔다. 이병완 의원은 “시민의 세금을 지키는 역할에 충실하겠다”고 말했다. 지방의회 의원의 권한과 역할, 원 구성 방식, 재산등록 방법 등 실무적 조언도 오갔다.

구의회는 7월 7일 문을 열었다. 지방자치법 제54조에 따라 가장 연장자인 그가 임시의장이 됐다. 구의회 의석은 13석. 민주당 8석, 민주노동당 4석, 그리고 그가 속한 국민참여당 1석이다. “의장은 제1당인 민주당, 부의장은 제2당인 민노당에서 맡도록 하자”는 그의 제안은 간단히 묻혔다. 민주당이 의장과 부의장을 모두 차지했다.

첫 임시회에선 상임위원회도 꾸렸다. 상임위는 운영·기획총무·사회도시위원회 등 3개다. 각자 관심사에 따라 위원회가 결정됐다. 그는 기획총무위원회에 배속됐다. 기획총무·사회도시위원회 소속 의원 중 각 상임위원장의 추천을 받은 5명이 운영위원회에서도 일한다. 그는 여기에 끼지 못했다. 7명으로 구성된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도 포함되지 못했다. 옛날에 무슨 자리에 있었든, 그는 지금 소수야당 출신의 초선 기초의원일 뿐이다.

7월 20일, 두 번째로 열린 임시회. 구에서 업무보고차 구의회를 찾았다. 총무국장, 기획감사실장, 총무과장, 보건지소장 등 주요 국·과장들이 왔다. 업무보고는 이런 내용이었다.

“경로당 허약노인 운동 프로그램을 7월 1일부터 26일까지 실시하겠습니다. 하지만 희망근로 사업이 26일 종료되기 때문에 더 이상 지속하기는 어렵습니다.”

“정보화 소외계층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기초과정, 포토샵 등 수요자 중심의 맞춤형 교육으로 주민의 정보화 수준 향상에 기여하겠습니다.”

“우리 구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울산 동구와의 교류사업으로 하반기에는 등반대회와 여성합창단의 초청 공연을 추진해 연속성 있는 양 도시 간 상호 발전을 도모하겠습니다.”

업무보고는 5일간 이어졌다. 사업들은 낯설었다. 이 의원은 딱 두 번 질문했다.

“경로당이 계단식으로 돼 있어서 가지 못 하고 댁에서 답답하게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개보수 할 때 신경을 썼으면 좋겠습니다.”(복지사업과장에게)

“공원에 있는 나무나 화초에 이름을 붙여두면 좋겠어요. 상당히 답답한 경우가 많습니다.”(공원녹지과장에게)

생각처럼 만만한 게 아니었다.

“구의원은 생업으로 하지 말라고 월급도 안줘요. 수당만 주죠. 자기 일 끝나고 봉사하는 개념으로 활동하라는 건데, 그게 원칙적으로는 맞는데 해보니까… 꽤 전문성이 필요해요. 서구만 해도 인구가 30만명이에요. 교과서적인 지방의원, 기초의원처럼 하기가 쉽지 않네요.”

다가오는 10월 예산심의 때 실력을 보여주겠다며 벼르는 중이다.

쇼 아니야?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홍보수석, 비서실장을 거친 그가 구의원이 됐다. 세상의 반응은 하나다.

‘쇼 아니야?’

잠시만 눈에 띄지 않으면 “서울 가버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소문이 도는 걸 보면 지역민들조차 뽑아놓고도 의심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의혹의 눈길을 씻기 위해서라도 지난 두 달 간 그는 바지런히 사람을 만났다.

“회기가 아닐 때는 지역 행사에 주로 가는데 너무 많아서 다 못갈 정도예요.”

통장 모임, 주민회와 유사한 지역자치위원회 모임이 열릴 때마다 동에서 연락을 해온다. 화정 3·4동, 풍암동 등 3개 동을 대표하는 구의원이기 때문이다. 주민센터에서 어르신들께 복날 음식 대접할 때도 그에게 전화가 왔다.

“‘통장회의에 나와주십시오’ 하고 전화를 받으면 가서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고민부터 됩니다. 가면 의원이라고 자리도 내주고 그러시는데 쑥스러워서 쭈뼛거리게 되고… 아직은 그렇습니다(웃음).”

여러 행사를 다니다보면 지역 현안도 자연스레 조금씩 알게 된다.

“고향이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이거든요. 37년만이에요. 지역구 골목도 제대로 알지 못해요.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그는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광주고등학교를 다녔다.)

지역에서 시민사회 활동을 했거나 교사·교수로 지내는 지지자 7∼8명이 그를 도와주고 있다. 자주 만나 지역 현안 공부를 하고 토론도 한다. 현재 제일 큰 현안은 관내에 있는 양동시장 현대화다. 광주의 대표적 재래시장으로 구가 시설 현대화사업을 지원해왔다. 상가 조명 LED 교체, 중앙통로 포장, 간판정비 사업 등이 진행 중이다. 시장 인근에 공영주차장도 조성할 계획이다.

“구에서 뭘 할 수 있는지 들여다보고, 공부도 하고 있는데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네요. 시에서 하는 사업이 많아서.”

그가 청와대 시절 전국적으로 그리던 판 위에는 4500만명과 300조원이 있었다. 지금은 30만명, 2000억원이다. 방식도, 고민도 다를 수밖에 없다. 곤혹스러웠다.

달라지는 게 많더라

이 의원 사무실은 광주 서구청 옆에 달린 의회 건물 2층에 있다. 기획총무위원회실이라는 간판을 단 문을 열고 들어서면 칸막이로 둘러쳐진 4개의 책상이 나온다. 그의 책상은 그 중 가장 왼편에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돌리면 다른 의원 일하는 모습이 보인다. 4명이 한 방을 쓰는 셈이다. 개인 비서도 없다. 누구라도 전화를 걸 수 있게 휴대전화 번호는 의회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 고스란히 공개돼 있다.

청와대 비서실장 시절, 그를 위해 4명이 일했다. 여비서 2명이 잡무를 도왔고 수행비서 1명과 3급 보좌관도 있었다. 개인 사무실 옆에는 회의실이 있었고 기사가 딸린 관용차도 있었다. 관사도 제공됐다.

급여 차이도 크다. 구의원 수당은 1년에 3000만원 정도. 한 달에 250만원 수준이다. 봉급 개념이라기보다 활동비 명목이다. 청와대 비서실장은 장관급으로 연봉이 8000만원 정도 된다.

주민들 기대는 30여년 만에 고향 땅을 찾은 그를 구의원으로 만들어줬지만 가장 큰 부담이기도 하다. 구의원에겐 민원이 많다. 특별한 기대가 있을 법하다.

“청와대 비서실장 출신이 왔다고 해서 구민들 기대치가 높을 수 있어요. ‘시장한테 이 얘기는 꼭 좀 해달라’ ‘시장 정도야 우습지 않겠어’ 뭐 이런 식의… 걱정입니다.”

하지만 더 큰 걱정은 따로 있다. 그는 “화면조정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망원경으로 보다가 현미경으로 보려니까, 뭐랄까… 의식구조도 그렇고 행동양태도 그렇고… 상당히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싶어요.”

구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중앙에서 일어나는 일이 자꾸 머릿속에 들어온다는 얘기다. 이번 ‘인사청문회 사태’를 보면서 2005년 1월이 떠오르고, ‘저기서 일이 어떻게 굴러가고 있구나’가 자꾸 그려진다는 소리다.

화면조정시간

“2005년 1월 4일, 홍보수석으로 청와대 있을 때였죠. 이기준 교육부총리를 비롯해 일부 각료를 임명했어요. 그런데 이 부총리가 내정 단계부터 의혹이 계속 불거져 나왔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국무위원은 청문회 대상이 아니었으니까 임명만 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이 부총리는 결국 1월 7일 자진사퇴 형식으로 낙마했다. 1월 9일 일요일 대통령 주재로 긴급회의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그는 “국무위원도 일종의 정치인이니 국회로부터 청문회를 받도록 하자”고 대책을 건의했다.

“홍보수석, 그걸 정리해서 발표하세요.”

대통령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이 수석은 같은 날 오후 2시 기자실에서 인사청문회 확대 방침을 밝혔다. 그때 결과가 지금 눈앞에서, 이번 인사청문회를 통해 펼쳐지고 있었다.

“대통령께서 ‘인사청문회 대상을 넓히는 게 정권으로서는 상당히 부담이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야 사회가 진보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 장면들이 하나하나 어제 일처럼 생각이 나는 거죠.”

중앙을 향한 안테나가 잘 접히지 않는다며 괴로워하는 이 의원에게 내친 김에 인사검증에 대해 더 물었다.

“당시 이기준 파동 이후 ‘병역미필, 탈세,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음주사고 5개는 절대 불가’로 인사 매뉴얼을 강화했어요. 그걸 모든 고위공무원 승진에 똑같이 적용시켰죠.”

2006년 8월, 청와대는 선거로 뽑힌 모 국립대 총장 임명을 거부했다. 당시엔 ‘음주운전 전력이 문제가 됐다’고만 알려졌었다.

“조서를 보니 직업란에 ‘무직’이라고 돼 있었어요. 경찰에 거짓말을 한거죠. 그래서 청와대가 부적격 판정을 내린 거예요. 외교부 모 고위 관리도 이런 이유로 승진에서 누락됐는데 ‘청와대 자주파들이 자신을 견제했다’는 식으로 말하고 다니더군요.”

그는 검증 시스템이 문제라는 건 틀린 말이라고 했다.

“검증 시스템은 정말 잘 돼 있어요. 음주사고라면 음주사고 당시 조서까지 볼 수 있잖아요. 그런 기준을 어느 정도로 심각하게 인식하고 검증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예요. 조현오 경찰청장 문제도 똑같습니다. 서울경찰청장이 그런 강연을 하면 바로 다음날 청와대로 보고가 올라와요. 3월에 강연했는데 언론 보도 되기 전까지 조 청장이 그런 발언을 했다는 걸 청와대가 몰랐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아요. 그런데도 멀쩡한 경찰청장을 자르고 내정했잖아요. 알고도 추천한 거예요. 의지와 가치관의 문제죠.”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망원경 버리고 현미경을 들어야 하는데, 흠….” 중간 중간 푸념이 멈추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큰 의자

그의 출마는 청와대 재직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서실장 시절에 참모들이 “끝나고 뭐하실 거냐”고 물었다. 덜컥 “구의원 하겠다”는 말이 나왔다.

“구의원을 좀 만만하게 본 것 같아요(웃음). 제가 정무적으로는 나름 뛰어납니다만 정치적 기질은 없어요. 내성적이기도 하고. 국회의원은 못하겠더라고요.”

그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을 거쳐 청와대 생활을 10년 정도 했다.

“건방진 얘기지만 청와대 생활을 오래 하다보니, 볼만큼 보고 알만큼 안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자리에 대한 욕심이 안 들더군요. 은퇴는 이르고. 구의원 하면서, 지역 학교에서 가르치면서 생활하면 참 좋겠구나, 막연히 생각한 거죠.”

계획은 노무현 대통령 퇴임 후 구체화됐다. 2008년 5월쯤 봉하마을에 갔다. 이런 저런 이야기하다 노 대통령이 대뜸 말을 꺼냈다.

“제가 김해시의원 출마하면 어떨까요. 이 실장은 고향이 어디세요? 우리 한번 생각해봅시다.”

이후 지난해 10월 국민참여당 창당준비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 당원들에게 “구의원으로 출마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참여민주주의 가치를 중히 여기는 참여당의 정신과도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살고 있던 송파구의회에 진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땅한 광주광역시장 후보를 찾지 못한 참여당이 그를 차출했다. 할 수 없이 예비후보 등록을 위해 광주로 주소를 옮겼다. 이후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참여당에 입당한 정찬용(전 청와대 인사수석) 후보와의 단일화 경선에서 졌다. 자연스레 평소 꿈꾸던 구의회에 출마했다.

“장·차관을 했던 고위직 중에 이런 생각을 갖고 계신 분이 꽤 있어요. 다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쑥스러워서 못하는 것이죠. 새로운 풍토 조성에 기여했으면 싶어요.”

그래서, 그는 지금 만족할까.

“팔순 노모와 함께 지낼 수 있다는 점이요. 지역민들 만나는 것도 물론 재미있고요.”

그는 매달 첫째 주 금요일 ‘이병완의 폴리아카데미’라는 시민강좌를 열고 있다. 지금은 혼자지만 지역의 경험 있는 분들을 모셔서 강좌를 정착시키고 싶다고 했다.

독서계획도 새로 세웠다. 일종의 ‘청와대 경영학’을 정립해보겠다는 것이다. 그는 김영삼 대통령 시절엔 청와대 출입기자였고, 김대중 대통령 땐 청와대 비서관을 지냈다. 세 명 대통령을, 청와대 안팎에서 10여년간 지켜봐왔다.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의 회고록과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 시절 청와대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있어요. 구의원으로 활동하는 짬짬이 폴리아카데미 운영하고, 독서를 통해 공부도 하고, 그러고 싶어요.”

그와 함께 의회 회의장을 둘러보러 갔다. 의원들 좌석은 일렬로 배치돼 있었다. 맨 끝자리가 이 의원의 지정석이다. ‘李炳浣’ 명패도 놓여 있다.

“이제껏 앉아본 의자 중에 가장 큰 의자예요. 정말이에요.”

광주=김원철 기자 won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