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한흠 목사는 누구인가?
입력 2010-09-02 15:51
[미션라이프] 경남 거제의 4대째 신앙 가문에서 태어난 옥한흠 목사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사경회를 통해 회심을 경험했다.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던 그에게 주위에서는 목회자가 되라고 했지만 가난이 싫어 해군사관학교로 진학을 결정했다. 하지만 고혈압으로 신체검사에 탈락하고 대학 진학에도 잇따라 실패하면서 방황의 나날을 보냈다.
시골 교회 마룻바닥에서 기도의 나날을 보내던 그는 결국 목회자의 길을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군대에서는 대학 입시 준비하던 중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대학 시절에 대해 그는 “몸이 안좋아서 고생하던 일과 아내를 만난 일밖에 기억에 안남는다”고 회고했다. 숙명처럼 가난과 질병이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총신대 신대원을 졸업한 뒤엔 은평교회 전도사를 거쳐 성도교회 주일학교를 담당했다. 당시 김희보 담임목사는 그가 청년 사역에 은사가 있는 걸 간파하고 대학부를 맡겼다. 대학부라야 방선기(현 이랜드 사목) 한 명이 전부였다. 그가 데리고온 서울대 네비게이토 학생들과 사역하면서 옥 목사는 비로소 제자훈련에 눈뜨게 된다. 유학을 간 미국 웨스터민스터신학교 구내서점에서는 그의 평생 목회를 결정짓는 한스 큉의 ‘교회론’이란 책과 맞닥뜨린다. ‘모든 평신도는 사도의 계승자로서 세상으로 보냄받은 예수의 제자’라는 내용이 그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이름 있는 교회의 청빙이 잇따랐지만 그는 모든 걸 뿌리치고 1978년 7월, 사랑의교회를 개척했다.
그의 예배 인도는 파격이었다. 설교는 강단에서 내려와 교우들 얼굴을 바라보며 했다. 마치 소그룹 하듯 예배를 인도한 것이다. 원색적이고 직설적인 메시지는 성도들의 마음을 찌르고 삶의 변화를 이끌었다.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제자훈련에 미친 사람’이다. 제자훈련은 평신도로 하여금 신앙과 삶이 일치하도록 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목회자가 제자훈련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매일 새벽 5시30분부터 밤 10시가 넘도록 소그룹과 씨름했다. 이같은 사랑의교회의 제자훈련은 1980년대 ‘평신도를 깨운다’는 책을 통해 한국 교회에 널리 퍼기지 시작했다. 제자훈련은 또한 한국 교회의 고질병이던 교파주의와 개교회주의, 기복신앙과 물질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교회상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까지 2만여명이 거쳐간 사랑의교회 제자훈련은 이제 일본, 중국, 몽골, 아프리카 등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그는 목회자의 자기 부정이야말로 건강한 교회의 첩경이라고 믿었다. 허수 허세 허상 등 한국 교회에 3허(虛) 현상에 대해서는 목회자의 통렬한 반성을 촉구했다. 명예와 권력이 따르는 교단 총회장, 연합기관 회장에도 수차례 타천되기도 했지만 모두 거절했던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옥 목사가 제자훈련에 치중했다고 해서 대 사회사역을 게을리한 것은 아니다. 사랑의교회는 창립 당시 제자훈련과 함께 북방선교를 교회 표어로 내걸었다. 홍정길 목사와 함께 연변과기대 설립에 적극 참여한 것도 같은 이유다. 옥 목사는 최근에도 “매일 북한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며 억압된 체제와 가난 속에서 고통받는 북한 주민들을 향한 애절한 마음을 쏟아냈다. 소년소녀가장 돕기, 북한 어린이 돕기, 공단선교, 장애인선교, 호스피스 등 사랑의교회는 제자훈련 못지않은 다양한 사회 섬김 활동을 펼쳐왔다.
2004년, 그의 65세 조기 은퇴는 한국 교회를 넘어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국 교회의 세습문제가 한창 사회적 지탄을 받던 와중에 제자이던 오정현 목사에게 담임목사직을 위임하면서 그는 아름다운 목회자로 추앙받았다. 이를 통해 추락하기만 하던 한국 교회의 신뢰도가 몇 단계 업그레이드 됐음은 물론이다. 목회자의 자기 부인이야말로 교회가 살고, 한국 사회가 사는 길임을 그는 삶으로써 보여준 것이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