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문자로 쓰이지 않은 역사책
입력 2010-09-02 17:35
‘얼굴이 말하다’ 박영택/마음산책
“얼굴은 책이다. 그가 살아온 삶의 이력과 상처들로 울울한 숲이다. 따라서 얼굴은 속일 수 없다. 그것은 문자로 쓰일 수 없는, 쓰이지 않은 역사책이다. 따라서 우리는 누군가의 얼굴을 읽는다. 본다는 표현은 어딘지 부족하다. 얼굴은 읽어야 하는 텍스트다.”(142쪽)
성형외과와 피부과 기술의 발전이 별로 뉴스도 되지 않는 요즈음, ‘얼굴을 속일 수 없다’는 명제에 동의할 수 없는 독자들도 많겠다. 하지만 일생을 통해 형성하는 인상과 지성, 냉소와 열정이 가장 무방비하게 드러나는 곳이 다름 아닌 얼굴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림, 사진, 조각 등 한국 현대미술 작품에 숨겨진 ‘얼굴’들에 대한 책 ‘얼굴이 말하다’(마음산책)가 나왔다. 저자는 경기대 미대 박영택(47) 교수. 그는 현대미술가 58명의 그림, 조각, 사진작품 99점에 나타난 ‘얼굴’을 10개의 주제로 나눠 미술작품이 사회·문화적 조건 속에서 어떻게 그려지고 읽히는지 짚어냈다. “얼굴 이미지가 드러난 수없이 많은 작품 가운데서도 상투적이고 관습적인 얼굴을 배제하고 작품성이 뛰어난 것들을 엄선했다”는 게 저자와 출판사 측의 설명이다. 학문적 서술보다는 저자 개인의 경험을 살려내 주관적이면서도 명료하게 작품을 설명한 이 책은 초보 독자를 위한 미술 입문서로서도 부족하지 않다.
모든 예술작품이 그러하듯, 우울한 현대사가 묻어 있는 미술작품 속의 ‘얼굴’에선 삶과 죽음, 욕망과 두려움, 감정과 공허가 읽힌다. ‘읽는다’는 건 단순히 색채나 디테일을 ‘보았다’는 의미와는 다르다. 화가가 드러낸 그림의 ‘정치적’ 의도, 자신도 모르게 표출한 내면의 정서, 그림이 탄생한 시대적 배경까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감상하는 즐거움을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화가가 그린 것이 ‘얼굴’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책에 실린 작품들도 단순하지 않다. 김구의 얼굴을 사용해 이승만의 얼굴을 표현한 김동유의 ‘이승만’(김동유는 김일성의 얼굴로 박정희를 표현한 ‘박정희’도 그렸다), 유니폼처럼 얼굴에도 규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보여주며 획일화된 교육과 문화를 비판하는 서도호의 ‘유니-페이스’, 80년대 순정만화 주인공처럼 접시만한 눈동자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리는 공허한 표정을 보여주는 김정욱의 제목 없는 작품, 쌀을 담은 부대자루에 농부 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린 이종구의 ‘연혁-아버지’는 모두 한 사람의 얼굴을 통해 작품이 그려진 시대의 사회상과 분위기까지를 알려 준다.
작가의 주관을 덧입고 미화되거나 과장되거나 의도적으로 곡해된 모습을 하고 있는 작품들도 여럿 눈에 띈다. 수없이 많은 눈이 달린 표정을 그린 정복수의 작품 ‘몸이란 얼마나 혼란한가’, 화장하는 여자를 캐리커처 그리는 방식으로 과장되게 표현한 임태규의 작품들, 인물보다 케이크를 더 크게 처리한 김정선의 ‘핑크 케이크’는 기억과 주관에 기반해 사물을 인식하는 인간의 속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저자도 말한다. “내 얼굴이 보았던 얼굴, 내 얼굴이 기억하는 그 누구의 얼굴, 혹은 서로 그렇게 쳐다보았을 두 얼굴의 겹침을 기억해본다. 결국 얼굴이란 두 존재가 만났을 때 가능한 장소다”(188쪽) 라고.
어쩔 수 없이 얼굴은 누구에게나 보여줄 수밖에 없는, 나이와 성품과 인생까지를 드러내는 신산한 텍스트다. 마흔이 넘으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링컨의 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 책은 우리 자신의 얼굴이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를 자문케 한다. 내 얼굴의 색채는 무엇이며 내 눈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먼 훗날 내 모습이 담긴 한 장의 사진은 어떻게 읽힐 것인가. 어쩌면 모두의 얼굴은 ‘유니 페이스’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군데군데 논리적 비약이 드러나는 구절이 눈에 띄는 점을 제외하면, ‘얼굴이 말하다’는 미술 뿐 아니라 우리나라 현대사와 문화, 인간의 심리까지를 폭넓게 통찰한 책이다. 책을 읽고 주위를 둘러보면, 누구의 얼굴이라도 예사롭게 비치지 않는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