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전석운] 빌 게이츠와 이건희

입력 2010-09-01 17:43


오는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G20 비즈니스 서밋을 계기로 미국의 최고 부자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의장이 한국의 최고 부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따로 만난다면 무슨 얘기를 나눌까.

어쩌면 게이츠 의장은 자신이 주도하는 재산 기부 운동에 이 회장의 동참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는 미국의 억만장자들을 상대로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게이츠가 워런 버핏과 함께 주도하는 이 기부운동에 오라클의 공동창업자 래리 엘리슨, CNN 창업자 테드 터너,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 등 40명의 미국 갑부들이 동참을 선언하는 등 호응이 적지 않다. 이들이 약속을 모두 지킬 경우 기부 총액은 6000억 달러에 달한다. 한화로는 약 710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규모다.

하지만 게이츠의 재산기부운동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미국 내 보수층에서는 게이츠의 재산기부운동이 사회주의적 발상이라고 비난하는 견해가 존재한다. 심지어 그의 행동을 포퓰리즘이라고 몰아붙이는 목소리도 있다. 기업가는 축적된 부를 투자와 고용창출에 쏟아 붓는 것이 사회적으로 더 의미있는데 재산기부운동은 자칫 시장경제를 왜곡하고 자본주의의 근간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럽 갑부들은 미국 보수층과 다른 이유로 게이츠 식 재산기부운동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독일 함부르크의 거부인 페터 크래머는 최근 시사주간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부자들이 막대한 돈을 세금이 아닌 기부금으로 내놓을 경우 그 돈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정부가 아닌 극소수 부자들이 결정하게 된다”며 “누가 그들(부자들)에게 그런 권한을 주었느냐”고 반문했다. 기부금 내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약자를 돕는 주체와 방식이 문제라는 것이다.

게이츠 의장이 재산기부 운동의 정당성 논란에 휘말리고 있다면 이건희 회장은 이른바 대기업-중소기업 ‘상생’의 범위와 진정성 논란을 놓고 고민에 빠져있을 것이다. 사실 이 회장이 한국 최고의 갑부임에는 분명하지만 그의 재산은 72억 달러(포브스지 추산)로 게이츠의 그것에 비하면 7분의 1이 채 안 된다. 이 회장뿐 아니라 한국의 대기업 총수들에게 지금 당면 과제는 기부가 아니라 상생이다.

상생의 탄생 배경은 양극화다. 한국의 일부 대기업들은 사상 최대 이익을 구가하는데 중소기업과 서민들은 여전히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하고 출범한 이 정권에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중소기업보다 대기업에 우호적인 정책을 폈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다.

정부는 고질화된 청년 실업 문제를 해소할 방법을 찾지 못해 대기업들을 압박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한계가 있다. 우리 경제가 노동력집약 산업구조로 되돌아가기 어려운 점을 감안하면 생산성을 악화시키는 마구잡이 채용으로 우리 사회의 실업난을 해결하기 어렵다. 몇 년 전 카드 대란의 후유증을 앓았던 것처럼 언젠가는 인력구조조정을 겪을 게 분명하다. 이러다 보니 정부의 시선을 의식한 대기업들이 중소협력업체들을 지원하는 각종 상생방안을 앞다퉈 내놓고 있지만 진정성과 효율성 면에서는 썩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상생 논란은 정부가 할 일과 기업이 할 일을 구분하지 않는 데에 있다. 일부 대기업 총수들은 중소기업의 현장을 찾아가 애로사항을 청취하는 모습을 언론에 공개하기도 했는데 보기에 딱하다. 정치인이나 정부가 해야 할 일을 기업인이 대신 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정부는 시장질서를 교란하는 기업이 있으면 처벌하고 공정한 경쟁이 되도록 장려하면 된다. 기부든 상생이든 가진 자의 사회적 책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접근방식과 사회적 상황에 따라 기업가 혹은 부자의 사회적 책무를 어떻게 규정하는지는 쉬운 문제가 아닌 듯하다. 빌 게이츠와 이건희의 회동에서 한 차원 높은 노블레스 오블레주가 탄생하기를 기대해 본다.

전석운 산업부 차장 swch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