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이강렬] 북한 식량지원 재개 할 이유 있다

입력 2010-09-01 17:45


“분배 투명성을 전제로 인도적 차원에서 북한 주민의 극심한 고통은 덜어줘야”

남측 민간단체가 북한에 제공한 식량 모니터링을 하기 위해 NGO 자격으로 북한의 후방 지역을 방문한 적이 있다. 평안남도에서 강원도로 넘어가는 마식령산맥의 무지개터널(북한은 십리굴이라 부른다)을 통과할 때 터널 개보수를 위해 차량이 30분 간격으로 교행을 했다. 일행은 차에서 내려 이곳을 경비하는 북한 인민군 10명과 농민, 어린이들을 만나 대화할 기회를 가졌다. 필자의 키는 남한 남성 평균 키에 못 미치는 160㎝. 그런데 이곳에서 만난 인민군과 농민들의 키는 모두 160㎝ 미만이었다.

우리 사회는 지금 남아도는 쌀을 북한에 지원할 것인가를 놓고 한참 논쟁 중이다. 북한의 천안함 폭침 만행에 대한 온 국민의 통분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는데 언감생심 북한에 쌀을 준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여론이 만만치 않다. 보수 진영에서는 “짐승에게 먹일지언정 김정일에게는 줄 수 없다”는 강경한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정부는 북한에 대한 쌀 지원 불가 방침을 세우고 2005∼2008년산 재고미 50만t을 가공용으로 사용키로 결정했다. 국민 정서상 북한에 식량을 제공하기는 아직 이르다는 판단에서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과거와 현재의 ‘항암치료’ 방식이다. 의사가 화학, 방사선 요법 등 여러 항암치료를 하다 보면 암세포도 죽이지만 정상세포까지 다치게 된다. 때문에 환자는 치료 부작용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 지금은 의료기술 향상으로 정상세포를 놔둔 채 암세포만 공격할 수 있는 여러 치료법이 개발됐다.

3대에 걸쳐 세습을 노리며 북한을 지구상의 최빈국으로 만든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비롯해 통치에 가담한 기득권 세력은 북한 인구 2500만명 가운데 100만명이 안 된다. 지금까지 우리의 대북제재는 김정일 세력뿐 아니라 대다수 북한 주민들에게 고통을 주는 방식이었다.

미국은 지난 30일 천안함 폭침을 주도한 북한 인민무력부 산하 정찰총국 등 김 위원장의 비자금 관리 기관들을 겨냥해 강도 높은 제재를 시작했다. 미국은 이미 수년 전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예치된 김정일 비자금 동결을 통해 북 지도층에 극심한 고통을 준 일이 있다. 수백㎞ 밖의 목표물을 불과 몇 m의 오차로 미사일 공격 하듯 미국은 북한 정권 담당자들에 대해 ‘정밀 타격’을 시작했다. 이 같은 ‘김정일 목 조르기’ 효과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있으나 현재까지 가장 강력한 제재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의 대북 식량 제재는 어떨까?

문제는 과거 항암치료에서 보듯 악성 암세포를 죽이기보다 주변 정상세포에게 너무도 큰 고통을 준다는 것이다. 최근 신의주를 비롯한 북한 여러 지역이 수해로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 북한 방송이 피해 사실을 즉시 보도하고 세계 각국에 구호를 요청한 것을 보면 피해가 꽤 심각한 모양이다. 남측은 매년 40만t씩 북한에 제공하던 식량 지원을 이 정부 들어 2008년 이후 중단했다. 지난 정권의 ‘퍼주기’ 논란에 대한 반작용과 오만한 북한을 길들이려는 차원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김정일 세력보다는 북한 주민들이 훨씬 더 고통을 당하고 있다.

남북한 간 체제 우월성 경쟁은 이미 끝난 지 오래다. 북한 주민들은 북한 당국이 포장을 바꿔 남측이 보낸 물자를 분배해도 그것이 남쪽에서 왔다는 것을 안다. 현 정부가 대북 식량지원 중단을 북한 압박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효과보다 부작용이 크다. 식량 부족으로 김 위원장 등 소수의 집권세력이 굶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힘없는 북한 동포들만 괴로울 뿐이다.

북한 정권 담당자들과 북한 주민은 분명히 구분돼야 한다. 천안함 폭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북한 집권세력을 고사시킬 ‘정밀 타격’은 더욱 강화하되, 식량 부족으로 인한 북한 주민들의 극심한 고통은 인도적 차원에서 덜어줘야 한다. 물론 이 같은 식량지원 재개에는 일부에서 우려하는 분배의 투명성이 전제돼야 하지만 이는 얼마든지 대북 협상을 통해 가능하다고 본다.

이강렬 국장기자 ry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