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조선땐 中서 하사… 대한제국 이후 자체 제작
입력 2010-08-31 21:17
도장에는 새(璽)와 인(印)이 있다. 새는 황제의 도장, 인은 신하나 백성의 도장이다. 처음에는 구분이 없었으나 중국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뒤 황제만 국새(國璽)나 옥새(玉璽)라는 명칭을 쓰도록 했다. 신하나 백성들은 인이나 장(章)이란 명칭을 썼다. 새라는 명칭도 당나라를 거치면서 보(寶)와 함께 혼용돼 쓰였다. 보는 국가용으로 쓰이던 새와는 달리 개인적으로 사용하던 황제의 도장이었다.
우리나라에선 고려말 공민왕 때 중국 명나라 황제가 내려준 국새를 받아 썼다. 새나 보란 말을 쓰지 못하고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고 했다. 조선도 마찬가지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 국새를 명나라에 반납하고 새것을 요청했지만 태종 때 ‘조선국왕지인’이란 국새를 하사받았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나라로부터 국새를 받았다.
조선은 중국에서 받은 국새를 왕위 계승이나 외교문서 작성 등에만 사용했다. 일상적으로는 중국 몰래 ‘국왕행보’ ‘국왕신보’ 등 여러 가지 어보(御寶)를 만들어 사용했다. 조선시대 사용된 국새는 왕조실록 등 문헌으로만 기록이 남아있을 뿐 실물은 하나도 없다.
국새를 중국에서 하사받지 않고 우리 자체적으로 만든 것은 1897년 대한제국 수립 이후다. ‘대한국새’ ‘황제지새’ ‘황제지보’ 등이 만들어졌다. 나라를 잃을 위기에 처한 고종이 외국 황제들에게 외교적 지원을 호소하는 친서를 보낼 때 사용한 비밀 국새인 ‘황제어새(皇帝御璽)’는 2008년 재미동포로부터 사들여 고국으로 돌아왔다. 국가지정문화재(보물 1618호)로 지정된 유일한 국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4개의 국새가 만들어졌다. 1948년 건국과 함께 만든 1대 국새 ‘대한민국지새(大韓民國之璽)’는 민홍규씨가 스승이라고 부른 석불 정기호씨가 제작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삽살개 장식을 얹어 은으로 만든 이 국새는 1963년까지 사용됐으며 현재 분실상태다.
2대 국새는 63년 제3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제작됐다. 국새 윗부분의 장식인 ‘인뉴(印紐·손잡이)’는 거북이였고, 인문(印文)은 한글 전서체로 ‘대한민국’이라고 새겨졌다. 1대 국새와 마찬가지로 은으로 만들어져 1998년까지 사용됐지만 사방의 길이가 7㎝에 불과하고 인뉴가 중국 제후국의 상징인 거북이라는 점이 논란을 불렀다.
3대 국새는 1999년 정부 수립 50주년을 맞아 만들어졌다. 인뉴는 봉황으로 하고 크기도 커졌다. 첨단 과학을 동원한 금 합금 주물로 제작된 이 국새는 사용 초기부터 균열이 생겼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됐고, 이 때문에 2007년 문제의 4대 국새를 새로 만들었다.
왕조시대에는 왕권의 상징이었던 국새가 오늘날에는 국가의 상징으로 나라의 중요 문서에 사용하는 도장으로 쓰이고 있다. 대통령령 제6조의 국새 사용 규정에 따라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의 지위에서 행하는 헌법 공포문, 훈·포장증, 5급 이상 공무원의 임명장, 중요 외교문서 등에 날인되고 있다.
이광형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