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영성의 길

입력 2010-08-31 17:36


(9) 겸손의 기도

겸손은 영성생활의 최고봉이다. 모든 덕은 겸손으로 모아지고 모든 기도는 겸손으로 귀결된다. 묵상과 금식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세계를 응시한 사람은 교만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안다. 살인, 정욕, 미움, 탐욕이 큰 죄가 아니라 교만이 가장 큰 죄다. 다른 죄는 연약함에서 온다.

그러나 교만은 우리 속에 있는 악에서 기인한다. 다른 죄는 실수로, 혹은 환경으로부터 온다. 그러나 교만은 우리의 악한 본성과 의도적인 반항에서 온다.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두 가지 죄를 언급했다. 동물적 본성에서 나온 죄와 마귀가 직접 사주한 죄다. “다른 죄, 곧 시기, 술 취함, 정욕, 미움, 탐욕 등이 사단이 우리의 동물적 본성을 이용해서 짓게 되는 죄라면 교만은 지옥에서 곧장 올라온 마귀 자신의 죄다. 다른 죄가 도덕적 죄라면 교만은 영적인 죄다,” 그렇다. 모든 교만 속에는 ‘내’가 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시하거나 알아주지 않고 쓸데없이 간섭하면 싫다. 왜 싫은가? 내 속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모임에서 한 사람이 거물급처럼 행세한다. 보기 싫다. 왜 싫은가? 내가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처럼 되고 싶은데 그가 내 대신 거물급이 되었기 때문이다.

남이 잘하고 칭찬받는 것을 보면 싫다. 내가 그 사람처럼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만은 끊임없는 비교와 경쟁으로 나를 드러내는 것이다. 교만은 단순히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나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압도하여 그를 짓밟고 올라서야 한다. 교만은 끝까지 남과 비교하여 내가 이겨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앤드루 머레이가 말했다. “겸손이란 자아가 비켜나고 하나님을 왕 위에 모시는 것이다.” 언제나 교만의 문제는 내 속에 있는 나다.

크리프트라는 사람이 겸손에 대해 탁월하게 말했다. “겸손이란 내가 못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생각을 덜 하는 것이다.” 우리는 내가 부족하고, 연약하다고 말하면 겸손인 줄 알지만 무엇이라고 말하든 우리의 마음 중심이 중요하다. 말로 자기를 부인해도 속으로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다면 그것은 교만이다. 자기가 잘한 것을 자랑하는 것은 물론 교만이지만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해도 자기 자신에게 여전히 집착하고 있다면 그것 역시 교만이다. 교만은 말의 강하고 부드러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내가 있는 상태다. 불신자에게는 불신자의 교만이 있고 신자에게는 신자의 교만이 있다. 평신도에게는 평신도의 교만이 있고 목사에게는 목사의 교만이 있다.

기도는 내 속에 있는 나를 하나님 앞에 굴복시키는 것이다. 기도의 최고 목표는 하나님 앞에서 나를 겸손하게 세우는 것이다. 한번은 기도하고 있는 한 수도사 앞에 마귀가 천사의 모습을 가장하고 나타났다. “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가브리엘 천사다.” 이 말을 들은 수도사가 그 자리에 엎드렸다. “나는 미천한 종이라 천사의 방문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 순간 마귀가 떠나갔다. 기도의 능력은 소리의 크기에 있지 않고 겸손의 크기에 있다. 이것이 큰 소리로 기도한 바리새인보다 작은 소리로 기도한 세리가 먼저 응답받은 이유이다(눅 18:9∼14). 겸손이 곧 응답의 비결이다. 겸손은 내 속에 있는 나를 버리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겸손은 기도의 태도일 뿐 아니라 기도의 목적이다. 겸손해야 기도가 될 뿐 아니라 겸손해야 기도한 것이다.

이윤재 목사 (한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