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심쩍어 걸어보면 진짜로 공공기관… 인터넷전화 업체가 보이스피싱 방조?

입력 2010-08-30 18:41


증권사 직원 최모(31)씨는 지난 5월 한 남성의 전화를 받았다. 법무부 수사관이라고 밝힌 그 남성은 “당신 명의의 계좌 2개가 범죄에 대포통장으로 사용됐다”고 말했다. 그는 최씨가 범인인지 피해자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지정한 계좌로 돈을 송금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최씨는 휴대전화에 기록된 발신번호로 전화를 걸었고, 수화기에서는 “검찰청입니다”라는 ARS안내가 나왔다. 안심한 최씨는 이들이 시키는 대로 1800만원을 보이스피싱 조직의 계좌에 입금했다. 최씨는 30일 “전화가 검찰청으로 연결되는데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금융회사에 다니는 나도 속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공공기관의 전화번호를 이용한 보이스피싱이 끊이지 않는다. 경찰청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7월까지 보이스피싱 신고건수는 2900건으로 피해액만 294억원에 달한다. 이 가운데 공공기관을 사칭한 보이스피싱은 쉽게 속을 수밖에 없다. 일선 수사관들은 보이스피싱 조직이 공공기관 등 국내 유·무선 발신번호를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현행 전기통신사업법은 ‘재산상 이익을 취하거나 폭언·협박·희롱 등의 위해를 입힐 목적이나 영리를 목적으로 전화번호를 변작(변조)하거나 거짓으로 표시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를 어기면 5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내야 한다. 방송통신위원회 관계자는 “소방서나 관공서 등이 수신인 편의를 위해 119 같은 대표번호로 통일할 수 있지만 나머지 경우는 원천적으로 발신번호 변경을 금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인터넷전화 업체들은 발신 전화번호를 변경해주고 있다. 본보가 LG데이콤, SK텔링크, 삼성네트웍스, 온세텔레콤 등 인터넷전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8개 업체에 문의한 결과 이들 모두가 발신번호 변경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6곳은 개인 명의의 유선 전화번호로 변경이 가능했고 2곳은 가입자가 원하는 대로 번호로 바꿔줬다. A사 직원은 “법률상으로는 안 된다”면서도 “상대의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불편을 감수할 수 있다면 원하는 번호로 변경해 주겠다”고 말했다. B사 직원도 처음에는 “비어있는 번호에 한해 변경이 가능하다”고 말했으나 곧이어 “원하는 번호로 찍히게끔 해드리겠다”고 말했다.

발신번호를 바꾸는 수법의 보이스피싱이 2008년 처음 적발된 이후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지만 감독당국인 방통위는 별다른 사전조치를 취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방통위 관계자는 “방통위에는 실질적인 단속 권한이나 능력이 없다”며 “법령이 마련돼 있으니 수사는 수사기관에서 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6년부터 보이스피싱을 전담 수사한 서울 영등포경찰서 지능팀 이승환 수사관은 “자녀납치를 빙자한 사기 전화는 경황없는 피해자들이 국내 전화번호가 찍힌 것만 보고도 상대방의 말에 속게 된다”며 “2년 전부터 언론 등에서 발신번호를 가입자가 원하는 대로 변경해주는 문제를 지적했지만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