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는 십자가(마 21: 6∼9)
입력 2010-08-30 16:27
*이 글은 서울 모자이크교회 박종근 목사가 8월29일 주일 예배에서 행한 ‘피할 수 없는 십자가’란 제목의 설교로, 지난 23일 새벽 필리핀에서 괴한의 총격으로 숨진 조태환 선교사를 추모하는 내용이다. 안양대와 안양대신대원 교수를 역임한 박 목사는 조 선교사와는 학교에서 사제지간으로 만났다. 박 목사는 조 선교사를 ‘남다르게 의협심이 강하고 태권도 유단자로 사명감이 있던 학생’으로 기억했다.
피할 수 없는 십자가(마 21: 6∼9)
본문은 예수님이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의 장면을 기록한 내용이다. 예수께서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나귀를 타시고 수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호산나 호산나하고 외치는 그 사이를 행진하셨다. 그것은 대 환호였다. 그렇지만 왕으로 입성하신지 불과 1주일만에 예수께서는 엄청난 고난이 시작되었다.
영광스러운 왕으로 입성하신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그 무거움을 견디다 못해 쓰러지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아내시는 죽음의 사건으로 이어졌다. 군중 속에 왕으로 오신 그 영광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겨우 남은 것이 채찍에 맞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어떻게 영광스러운 왕으로 입성하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고 죽으셔야 했는가? 이해할 수 없다.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그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혹 종려나무를 들고 사람들의 환영을 받는 영광의 퍼레이드의 기획이 잘못되고 혹 그렇게 한 것이 섣부른 행동이었을까? 예수께서 오버하신 걸까? 우리는 본문을 깊이 묵상하면서 답변을 얻어야 한다. 영광에서 십자가로 이어지는 이 과정은 실패가 아니다. 기획이 잘못된 것도 아니다. 여기 진실한 답변이 성경 속에 있는데 이렇게 되어지는 것이 십자가의 참된 모습이다. 지난 주간 필리핀 마닐라에서 순교한 고 조태환 선교사의 죽음을 목도하면서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다시 알게 되었으며 오늘 이 말씀과 연결해서 우리 마음에 십자가의 참된 정신이 새겨지기를 소망한다.
1. 바라보는 십자가인가? 지고 가는 십자가인가?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종교적인 격식을 갖추는데 쓰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혹은 기독교의 상징이 십자가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걸어놓아야 하고 예배에 십자가가 빠지면 안 되는 요소라는 차원에서 십자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그렇게 하는 사람을 믿음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니다. 바라보는 십자가인가? 아니면 지고 가는 십자가인가? 장식용으로서의 십자가 아니다. 예수께서 영광스러운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데 일주일도 채 안되어 십자가의 고난으로 끝나게 되니까 그리스도의 영광까지 다 실패한 것으로 여기는 것일까? 아니다. 지고 가는 십자가는 영광의 퍼레이드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즉 골고다까지 갔을 때에 참된 영광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여, 바라보는 십자가가 아니라 지고 가는 십자가임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어느 복음성가 가수가 찬양하던 중에 잠깐 메시지를 주었는데 그것이 내게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는 교회에서 찬양을 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이 앞에 있는 십자가를 바라만 보고 있으면 그 십자가는 플러스밖에 안됩니다. 그러나 무겁더라도 힘들더라도 이 십자가를 떼어다가 내 인생의 어깨에 메고 걷기 시작하면 나중에 그 십자가를 땅바닥에 내려놓을 때 그 십자가는 곱하기가 될 것입니다. 그 곱하기가 된 십자가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폭발되고 모든 것을 정복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강한 도전이 되었는지 모른다. 여러분이여,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편안한 가운데 예배드리면서 십자가가 단지 기독교를 상징하는 많은 아름다움과 종교적인 좋은 격식을 갖추고 바라만 보는 십자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정말 더하기에 불과하다. 바라보는 십자가에서 지고가는 십자가가 될 때에 그 십자가는 곱하기가 될 것이다.
예수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라고 했다. 오늘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한다. “너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바라보는 십자가가 아니라 지고 가는 십자가가 되게 하라.”
우리의 예배도 보는 예배가 아니다. 드리는 예배가 참 예배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사랑은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줄 때 참 사랑이 된다. 왜 예수께서 그 영광스러움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가 굳이 십자가로 끝내셔야 했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주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종이나 노예는 그러한 책임의식이 없다.
성경은 말한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는 양과 같은 존재라고 했다. 제 길로 가고 헤맨다고 했다. 여기 제 길로 갔다는 말은 자기 좋은 대로 자기 취양대로 갔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셔야 했다. 주인이기에 자기 몸을 제물로 주셨다. 지고 가는 십자가가 영광의 십자가임을 믿으라.
여러분은 신앙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신앙을 단지 거룩하고 고요하고 조용히 고상함을 즐기는 소위 종교행위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로 여기는 것이 아닌지? 그렇게 하는 것이 격식 있는 신앙인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이 보여주신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다. 주님은 바라만 보는 십자가가 아니었다. 주님은 지고 가는 십자가였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내가 십자가 짐으로 나 아닌 다름 사람들이 나음을 얻고 다른 사람이 웃음을 되찾고 다른 사람이 희망을 볼 수 있도록 지고 가는 십자가이다.
오래전 미국의 교포교회 책자에 실린 글을 소개한 적이 있다. 지금은 후편이라고 해야 할까? 당시 지수아빠는 한국의 대기업에 근무하면서 미국지사에 근무하게 되었다. 어느 여름, 지수가 두 살 때 한국에 왔다가 악성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뇌를 크게 다쳤다. 장애자가 되었고 잠을 잘 때에도 특수침대에서 자야했다. 당시 잘나가던 지수 아빠에게 십자가였다. 하지만 지수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신앙적으로 거듭났다고 그는 간증했다. 그런데 최근에 그의 가정이 영주 귀국했다. 이게 후편이다. 이제는 한국의 의료시스템이 미국보다 더 좋아서 한국에서 지수를 돌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아직도 지수는 나아진 것이 없다. 열 댓 살의 지수는 아무 것도 모른다. 조금만 돌보지 않으면 숨이 넘어간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엄마와 아빠가 지수를 끌어안으면 곧 바로 울음을 멈추고 평온을 되찾는다. 제가 그 글을 보다가 아무것도 모르는 저능아가 된 딸을 사랑하고 안아주고 품어주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 가정은 바라만 보는 십자가가 아니라 지고 가는 십자가의 영광을 차지한 가정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각자 사정을 다 알 수 없지만 지고 가는 십자가의 영광을 차지하기를 바란다. 중국의 어느 지하교회 목사님의 간증이다. 그 교회에 지도자를 아주 어렵게 하는 성도가 있었다. 공산당에 핍박을 받는 것도 죽을 판인데 같이 섬기는 교인이 그렇게 어려움을 주고 가시노릇을 하니까 하루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꿈을 꾸는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 “하나님 나는 다른 것은 다 해도 저분은 내가 감당할 수가 없어요.” 그랬더니 하나님의 말씀이 “사실은 나도 감당 못해, 네가 책임지면 좋겠어” 제가 그 말씀을 들으면서 얼마나 은혜를 받았던지 가끔 이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설교중에 어느 목사님이 또 은혜를 받았다. 그 분은 당뇨 환자여서 시신경이 말라가고 정말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불안과 초조감으로 사역하며 살았다. 그렇지만 그 아픔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갔다. 지고 가는 동안 곱하기처럼 능력이 나타났고 즐겁게 사역을 하고 있다고 했다.
여러분도 피하고 싶은 사람, 피하고 싶은 일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바라만보면 감당할 수 없지만 지고가면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완성되는 영광스러운 갈보리의 승리가 나타남을 믿는다. 바라만 보면 감당할 수 없지만 지려고 작정하면 능력이 나타나고 영광이 되고 기적이 된다. 여러분들도 가정에서, 인생에서, 사회 생활 속에서 지고가기로 작정하면 실패의 십자가가 아니라 영광의 십자가가 될 것임을 믿으라.
2. 피하는 십자가인가? 직면하는 십자가인가?
우리는 가급적이면 십자가를 안 지고 싶어 하고 피하고 싶어 한다. 그냥 맞닥뜨려 직면해야 하는데 피하려고 할 때가 많다. 마태복음 11장 28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여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이다. 그러나 그 십자가속에는 여러분과 내가 들어 있다. 요한복음 1장 29절,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여기 세상 죄 속에는 내가 들어 있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죄가 들어있다. 그것이 주님이 지셔야 하는 죽음의 십자가이다. 주님의 의도는 이런 것이다. “내가 져야지 누가 지는가?” 누구도 대신 져 줄 수 없고 그 분만이 직면해야 하는 십자가였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또 든다. 왜 그렇게 십자가로 끝날 것을 영광의 몸으로, 그 호산나 호산나 하는 찬송 소리를 들으시며 예루살렘으로 가신 것일까? 영광스럽게 사람들의 호산나 환호소리를 들으면서 입성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 신약성경에서 헬라어로 호산나는 구약의 아람어를 번역한 말인데 우리는 흔히 호산나를 영광송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호산의 뜻은 “나를 구원하소서. 오직 홀로 날 구원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호산나는 나를 구원해 달라는 찬송이다. 그것은 주님이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아주 영광스럽게 왕으로 입성하신 것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십자가가 각각 다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분은 십자가를 감상의 도구로 묵상의 도구로 사모의 도구로 생각한다. 또한 구원의 십자가, 용서의 십자가, 사랑의 십자가, 승리의 십자가 등 다양하게 십자가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각각의 십자가 사랑이 다양하고 선호하는 주제가 있겠지만 주님이 좋아하시는 십자가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피하지 않는 십자가라는 점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가장 좋은 십자가이다. 피하지 않는 십자가가 가장 좋은 십자가이다. 그 십자가 속에 용서가 있고 사랑도 있고 승리도 있고 감사도 있고 영광도 있는 것이다. 그 십자가를 피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인간은 다 연약함이 있다. 어느 목회자 모임에서 한국교회 연세 드신 원로목사님의 설교시간이었다. 그 목사님이 설교하시다가 “여러분, 세상에 이혼 생각 한번 안하고 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말속에는 설교하는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설교 듣던 젊은 목사들이 다 깜짝 놀랐다. 그렇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잠재의식이 있고 잠재욕구가 있다. 어떤 때는 다 던져버리고 싶은 욕구가 있고, 어떻게 하면 지금의 현실을 피해 볼까하는 생각에 다 피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 그래서 완전히 다른 세팅을 해 놓고 마음껏 자기 좋은 대로 인생을 살고 싶은 욕망이 있다.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고 멀리 다망가고 싶은 생각도 있다. 하지만 피한다고 모든 것이 지나갑니까? 아니다.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젊어졌으면, 또 한 번 기회가 온다면, 모두 잠재의식에 사로잡히는데 사실은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현실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여러분이여, 우리에게는 이처럼 잠재의식 잠재욕구라는 것이 있다. 지금 말고 이것 말고 달리 살면 안 되나? 다른 길로 살 길은 없나? 하지만 다른 것은 없다. 쉬운 길은 없다. 우리가 택한 이 길이 십자가의 길이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있는데 손자가 아홉 명이 있다. 3남매가 결혼해서 세 명씩 자녀를 두었다. 하루는 할아버지 목사님이 가족모임을 가지면서 손자 손녀들에게 물었다. “너 예수님을 사랑하니? 예 사랑해요” 그렇게 해서 8명이 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대답을 했다. 맨 마지막에 아홉 번째인 3살 난 손자에 물었다. “너는 예수님을 사랑하니? 아니요. 나는 아빠를 사랑해요.” 그 이야기를 읽다가 순간 깨달은 것은 세 살 난 그 손자는 기회도 있고 아직 시간이 남아 있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도 있지만 이렇게 나이 먹은 나에게는 기회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못하면 기회가 없다.
피하면 피할수록 더 어려워진다. 영광은 피함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나귀타고 입성하시는 우리 주님은 그 십자가를 피하신 분이 아니다. 직면하신 분이시다.
우리 모두가 결단해야 한다. “피하지 않고 직면하고 가겠습니다” 하는 결단이다. 야고보 1장을 보면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기쁘게 여기라고 했다. 기왕 감당할 것 기쁘게 감당하겠다고 직면하는 자가 되자. 내 집, 내 가족, 자식, 내 환경, 내 사업, 내 직분 이 모두가 내가 피할 수 없는 십자가이며 지는 것이 영광이다. 여러분이 피하려고 하면 주님이 다시 오신다.
로마에서 박해받을 것이 무서워 도망가던 베드로에게 주님이 나타나실 때 베드로가 “쿼바디오스, 즉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나는 제가 지기 싫어하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 다시 로마로 간다.” 이런 식으로 주님을 만나지 않기를 바란다.
조태환 선교사, 그는 마음이 가난한 선교사였다. 그는 이미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버리고 필리핀 마닐라의 쓰레기더미가 쌓인 곳에 사역지를 삼았다. 짧지 않은 12년 동안 냄새나고 더럽기 짝이 없는 그 곳에 그는 예배당을 세웠다.
장례식에서 필리핀 교회의 현지 성도들의 조가로 부른 찬양은 “좋으신 하나님,” 조태환 선교사님이 가르쳐 준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찬양은 주품에 안기소서, 거친 파도가 밀려와도 주와 함께 걸으리 잠잠하게 주를 바라보리라라는 찬송을 불렀다. 조 선교사는 거친 파도가 밀려와도 그 죽음의 십자가 앞에서 15명의 안전을 위해 자신이 총을 맞고 쓰러졌다. 피할 수 없는 십자가를 그는 지고 갔다.
올해 43살이다. 몇 년 전 서울을 방문했을 때에 파송교회가 없어 도와달라고 했었다. 지금 얼마나 그것이 후회가 되는지 모른다. 그를 도울 수 있는 길이 있었는데도 스쳐 지나가고 만 것이 큰 후회로 남아 있다.
바울 사도도 로마에서 목이 잘리는 순교를 당했다. 베드로 사도도 로마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을 박혀 죽임을 당했다. 바라만 보는 십자가가 아니고 피하는 십자가가 아니라 지고 가는 십자가였고 직면하는 십자가였다.
우리 주님도 피하지 않는 십자가를 지고가다 마침내 “다 이루었다”는 영광을 얻으셨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실패한 십자가가 아니다. 거기에는 예루살렘입성의 영광을 다 이룬 사건이 되었다. 어떤 분이 동산을 거니는데 자기가 진 십자가가 너무 무겁더란다. 길을 가다가 번쩍거리는 금 십자가를 보고 얼른 자기 십자가 내려놓고 금 십자가를 졌단다. 한참 가다보니 너무 무거워서 금 십자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옆에 장미꽃으로 덮인 십자가가 있어 얼른 그것을 맸다. 그런데 가다보니까 장미꽃 십자가의 가시가 자꾸 찔러 너무 아팠다. 결국은 자기가 맨 처음 지고 갔던 십자가를 다시 지면서 그랬단다. “뭐니 뭐니 해도 내 십자가 지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다 한다.
여러분은 할 수 있다. 주님처럼 직면하면 다 질 수 있고 다 할 수 있다. 피하는 것이 최선이 아니다. 가장 좋은 것은 피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주여 이러한 은혜를 우리 가운데 허락하여 주옵소서. 들을 귀가 잇는 자는 들을지어다. 성령의 음성으로 듣기 바란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 앞에 십자가가 놓여 있다. 바라보는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가야 한다. 나아가 피하는 십자가가 아니라 직면하여 지고 가는 십자가이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 모두가 신앙생활에 영광의 새로운 날을 맞이할 수 있다.
기도/
하나님, 말씀해 주신 대로 피하지 않는 십자가, 제일 좋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십자가 지고 가는 행진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영광을 알게 하시고 십자가의 은혜를 알게 하시고 사명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