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김광웅] 職格을 다지고 계신지요?

입력 2010-08-30 17:40


“사람에게 인격이, 나라에 국격이 있듯 공직에도 적합한 인품과 행동 필요해”

어느 대학 총장 취임식에서다. 행사가 다 끝날 무렵 마지막으로 교가를 제창했다. 단상에 혼자 서 있던 신임 총장은 합창 내내 입 한번 뻥끗 못했다. 행사는 멋지게 끝냈지만 교가가 적힌 종이 한 장이라도 준비했더라면 저런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가시지 않는다. 주인공은 장관을 지내고 선거를 통해 총장이 된 인물이다. 교가를 모른다고 총장 자격이 없는 것이야 아니지만 격에 흠집이 생긴 셈이 되었다. 내방객에게 총장이 선물하는 것도 그렇다. 학교 마크가 찍힌 골프공보다는 학교 출판부가 발간한 교양서 한 권을 선물로 주는 것이 총장답지 않을까.

최근 어느 총장 취임식 장면도 되살아난다. 단상에 자리 잡은 전임 총장이며 학장 등 보직자들, 그리고 총동창회 회장은 그렇다 치더라도, 귀빈이긴 해도 왜 타 대학 총장이나 정부 고위관리들이 단상의 자리를 차지해야 할까. 자연에서 균형 상태를 이루는 변분의 원칙에 따라 자리는 항상 낮게 아래로가 안정되는 법이다. 현직(顯職)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격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집단 이성과 이미지가 그대로 나타나는 의식(儀式)의 구성과 진행이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람에게 격이 있고(人格) 나라에도 격이 있듯이(國格) 자리에도 격이 있다. 그것을 직격이라고 한다. 그 자리에 맞는 인품은 물론 그 자리가 필요로 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 대통령, 총리, 총장 등 자리에 맞는 사유, 언사, 몸가짐, 마음가짐, 의관 등을 갖추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어릴 때 고생하며 자랐다거나 인격이 고매하다고 해서 기관이 잘 돌아가는 것이 아니니 공직을 맡은 사람은 자신의 인격을 맡은 자리의 직격에 맞추는 적응부터 해야 한다.

대개들 일은 사람이 하지 자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한데 일은 자리가 한다. 자리에 정해진 법과 규정대로 일이 되는 것이고 거기에 격까지 갖추면 금상첨화다. 헤겔도 자리에 자연인들은 잠시 머물다가 떠나간다고 했다. 고위공직자가 시정(市井)에서나 하는 말투로 친서민적이랍시고 행동하면 공적 권위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격을 모르는 채 높은 자리를 맡은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조직의 인력, 예산, 기술, 정보 등 자원을 마음대로 활용하려고 든다.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영달을 위해 그 다음 더 높은 자리로 가려고 자원을 남용한다. 공직이 무엇이며 공공성이 무엇인지를 알면 행동할 수 없는 일을 다반사로 한다.

인물들이며 행사 장면 같은 것을 볼 때마다 이 나라가 선진국이 되려면 한참 멀었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는다. 높은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면 일단 그 경륜과 노력의 결과라고 인정해 받아들이긴 하겠지만 대개 관례나 겉치레에 몰두한 인상이 짙다. 지극히 비교육적인 것을 교육을 위한 것이라며 위장전입을 마다 않는 반법리적 인물이 있는 한 법치국가는 멀었다.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일수록 대개 여기저기 빈 자리를 기웃거리며 다닌 인물들이다. 이들은 대개 높은 자리를 얼마나 오래 버티었는가를 중요한 경력으로 즐긴다. 직격에 충실해 직책을 성실히 수행했을 때 직격과 인격의 함수관계가 맞아 떨어지고 그 인물은 자연인이 되어도 존경을 받는다는 나력(裸力)을 지닐 줄 알아야 한다. 한번 잘났으면 아무 노력 없이 영원히 잘난 것으로 착각하고 퇴임 후에도 행사 때마다 늘 헤드 테이블에만 앉으려고 드는 군상들을 어찌 하면 좋을까.

자리란 한때 내 온 능력과 인간됨을 바쳐 봉사하는 외경의 대상이다. 그런데도 행사 때 앉는 자리며 축사를 하는 것이며 식사 때 쓰잘데없는 화제의 주역이 되는 것 모두가 아직도 19세기 계급사회의 틀 속에 갇혀 있는 듯하다. 21세기가 진행되는 마당에 아직도 이 사회가 직책이나 직격 대신 사람과 신분에 초점을 맞추고 계급의식에 절어 있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계급을 물리고 직격을 터득하고 살리는 일이 시급하다. 그렇게 되면 인물도 존경 받고 자리도 신뢰를 되찾는다. 고위직 인사들은 몸가짐, 마음가짐에다 ‘자리가짐’에도 정성을 들였으면 한다.

김광웅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