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지방] 친일파와 매국노
입력 2010-08-29 18:27
좌옹(佐翁) 윤치호(1865∼1945)는 조선인 최초로 영어를 익힌 엘리트였다. 독립협회 2대 회장으로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며 개화·자강 운동을 이끌었다. 독실한 감리교인으로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 만세”라는 애국가도 썼다.
그는 일제말기까지 일기를 썼다. 고종황제가 승하했을 때는 “그를 생각하면 한 방울의 눈물이, 조선인을 생각하면 두 방울의 눈물이 맺힌다”고 기록했다(1919년 1월 23일).
국제정세에 대한 그의 인식은 정확했다. 하지만 점점 방관자적으로 변해갔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에, 그는 “조선독립 문제는 안건으로도 상정되지 않을 것”이라며 거부했다. 3·1운동 당시에는 종로 거리를 보며 이렇게 썼다.
“이 순진한 젊은이들이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불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에 눈물이 핑 돌았다. (중략)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는 내용이 매우 부실해 보였다.”
윤치호는 일본의 야비한 행태를 역겨워했다. 하지만 감리교의 발상지 영국을 비롯한 서양의 주요 국가들 역시 제국주의자에 불과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독립할 길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런 결론을 내린다.
“난 일본의 현명한 지도자들이 조선을 일본의 스코틀랜드(연방국)로 만들기를 염원한다. 조선을 일본의 아일랜드(식민지)로 만들어선 절대 안된다.”(1943년 3월 1일)
윤치호는 또 일본이 앵글로색슨족의 인종적 편견에 맞설 동양의 대안이라 여겼다. 창씨개명에도 동참했다.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이는 백인종과 황인종의 전쟁이라는 일제의 선전에도 귀를 기울였다.
조선인 징병제에 대해선 일본인의 조선인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깰 기회라며 오히려 반겼다. 당시 연희전문 교장이었던 그는 조선 청년들을 향해 “우리 반도 민중도 한 몫을 맡아 협력하자”고 주장하기에 이른다(1941년 12월 10일 부민관 강연).
해방 이후 윤치호는 반민특위에 체포돼 3개월간 투옥됐다. 1945년 12월6일 자택에서 뇌일혈로 사망했다.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그는 친일파였지만, 개인의 영달을 위해 나라를 판 매국노라 하긴 힘들다. 시대를 잘못 판단하고 역사에 대한 책임을 방관하면 오늘 우리도 윤치호가 될 수 있다. 친일 청산이라는 것은 남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게 아니라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를 돌아보는 것이 아닐까.
김지방 차장 p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