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옥선희] 8월의 고래

입력 2010-08-29 19:00


새벽 바다 수영을 하기에도 좋을 만큼 뜨거운 8월에 가을을 감지하는 이들도 있다. 고래가 8월의 고향 앞바다를 지나가면, 곧 가을이 오기 때문이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푸른 언덕에 서서 망원경으로 바라보는 고래 떼의 이동. 이 멋진 풍경에 환호하며 계절의 변화를 가늠했던 꽃다운 시절은 갔지만, 할머니가 된 지금도 망원경을 들고 고래 떼의 이동을 기다린다.

미국 메인주에 자리잡은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 성장한 자매가 남편을 잃고 서로를 의지해 살아온 15년 세월을 단 이틀로 압축해 보여주는 ‘8월의 고래(The Whales of August)’는 8월을 넘길 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아름다운 실버 무비다.

영화에서 고래의 비상은 우리 삶에 뛰어든, 혹은 우리가 잡고 싶어 했던 모든 것을 상징한다. 사랑했던 사람, 생각이 짧아 놓친 행운, 허술하게 대처한 사건들…. 고래는 내년에도 메인과 동해 바다를 찾아올 테지만 우리에겐 똑같은 사랑도, 기쁨도 오지 않는다. 방학과 휴가가 겹치는 8월에 나는 많은 방문객을 맞았고, 반갑고 귀하고 아쉬운 만남을 통해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한국어를 배우러 온 60대 일본 아저씨 다쿠미씨도 그중 한 분이다.

40년 경찰직에서 은퇴한 다쿠미씨는 몹시 쓸쓸했단다. 도자기, 붓글씨, 요가, 댄스, 여행 등의 취미생활로 바쁜 아내는 제발 집에만 있지 말고 뭐든 하라고 했단다. 은퇴한 일본 남성에 관한 기사에서 본 ‘젖은 낙엽’ 신세의 다쿠미씨가 떠밀려 택한 것이 한국어였고, 한 달 동안 한국의 대학으로 공부하러 간다고 하자 아내는 어서 가라며 환송했단다.

범죄자 잡는 험한 일을 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몸집도 작고 늘 웃는 얼굴에 어수룩해 보이기까지 한 아저씨. 아들이 세 살 때 그려준 개구리 그림, 핸드폰에 저장한 아내의 작품을 보여주며 행복해 하고, 사흘이 멀다 하고 아내에게 엽서를 보낸다. 자정 넘어서까지 공부하고 아침이면 배낭 메고 씩씩하게 학교에 가신다. 젊은이들과 어울려 공부하고 놀러 다니고 맛난 것 사먹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단다.

한글 읽기도 힘들어 하는 아저씨를 위해 나는 아침저녁 예습, 복습을 돌봐드렸다. 기숙사에서 지내는 어린 동급생들은 홈스테이할 걸 그랬다며 다쿠미씨를 부러워했고, 나는 다쿠미씨의 딸뻘되는 친구들을 초대해 북촌을 안내해 주었다. 다쿠미씨가 마지막 시험에서 60점 이상을 받으면 파티를 열어드리려 한다.

‘8월의 고래’에 출연했을 때, 릴리안 기시는 93세, 베티 데이비스는 78세였다. 영화 역사상 최고령 여 주연배우라는 기록을 남기며 ‘백조의 노래’에 다름 아닌 ‘8월의 고래’를 찍은 전설적인 스타들은 각기 119편의 영화를 남기고 100세와 81세에 세상을 떠났다.

‘8월의 고래’를 볼 때마다 이들의 나이에, 열정에, 기품에 감탄한다. 두 배우와 다쿠미씨처럼 늙어서도 가장 아름답고 좋은 일, 나만의 일과 공부를 하리라 다짐해 본다.

옥선희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