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 폭풍 같은 비밀을 키워 준 책들
입력 2010-08-27 17:42
작가들은 쓰는 존재이기 전에 읽는 존재다. 독서는 작가의 무기이며 힘이며 거울이며 천칭이다. 어떤 작가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거른 채 정오까지 꼬박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오후엔 먹고 놀고 또 먹고 잔다. 쓰는 게 노동이라면 읽는 건 휴식이다. 가끔 머리에 번개를 치는 휴식 말이다.
소설가 최성각(55)과 김도언(38)이 나란히 독서일기를 펴냈다. 최성각의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동녘)는 그가 거처하는 강원도 춘천시 퇴골에서 씌여졌다. “능지처참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평생 수많은 책을 사 모았던 허균은 ‘만 권 서책 중의 좀벌레가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허균은 죽어 소원대로 좀벌레가 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책벌레로서 나는 이 공간을 누리고 즐길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과 함께 이 세상 모든 서가들의 짧은 수명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명색이 작가인데도 그가 읽은 책들은 문학과 거리가 멀다. ‘문학이 더 이상 시대를 아파하지 않아서’라고 간명하게 말한 그는 나이 들수록 환경과 생태 쪽의 서적을 들추게 된다고 털어놓는다. 서두는 청춘의 독서라고 할 20대 중반에 맞춰져 있다. 대학시절 노자강독을 들으러 갔다가 함석헌 옹에게서 받은 책은 내내 생의 지침이 되었다. “나는 골목에 똥이 그득한 사택촌 끝자락의 한 자취방에 엎드려, 책을 읽으면서 여러 차례 흐느껴 울었다. 그래서 세로 조판의 ‘청년사’ 판 내 첫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에는 지금도 내 눈물자국이 배어 있다. 그것은 (저자) 디 브라운도 말하듯, 그 책이 ‘기분 좋은 책’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백인의 야비한 잔혹성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우리 현실 때문이었다.”
20대 후반, 최성각은 광산촌의 교사였다. 80년 사북사태가 옆 동네에서 벌어졌고 멀리 남녘에서는 학살극이 일어났다.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슬픔을 마음에 간직하고 책을 읽었을 뿐이다. 책은 그에게 암울한 시절을 버티게 해준 담요이자 모닥불이었고 때로는 몽둥이였다. 그가 읽은 책에는 그의 안광만 묻어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을 추천한 사람의 숨결과 인품, 추억도 함께 들어 있다. 30년 전 하사미 예수원 대천덕 신부에게 받은 헨리 조지의 ‘빈곤에서 벗어나는 길’은 지금도 읽고 있다. 월북 작가의 책이 모두 금서로 묶였던 시절, 소설가 이태준이 ‘이빵준’(이O준)이라고 불리던 그때 그는 이태준의 단편 ‘밤길’을 구해 읽고 가슴이 먹먹해오던 것을 기억한다.
그는 읽으려면 위대한 작품을 읽으라고 권고한다.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와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강의 다리’는 그에게 영원히 잊히지 않는 책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우리 시대, 희망의 근거를 독서의 힘에서 찾고 있다. 부록으로 실린 우리 시대 환경 고전 17권과 다음 100년을 살리는 141권의 환경책 목록은 이 책의 덤이다.
소설가 김도언의 ‘불안의 황홀’(도서출판 멜론)은 특별한 산문집이다. 인간의 불안과 욕망을 집요하게 파헤친 작품들로 주목받고 있는 이 개성파 작가는 2004년부터 일기를 써오고 있는데 그 분량이 지금까지 원고지 4000장에 가깝다. 그 가운데 1000장을 추렸다. 덕분에 그의 일상과 사유를 엿볼 수 있다. “내게 소설은 ‘사건’을 의미한다. 나에게 사건은 의미 이전, 기표 이전에 먼저 현동화되어지는 어떤 것이다. 마치 ‘안개의 번짐’처럼 말이다. 안개는 처음에는 사건이 아니었다가 사건이 된다.”(2004년 10월 1일)
그는 안개의 사건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사건이 가지고 있는 내재율을 읽어내기만 하면 소설쓰기는 한결 쉬워진다고 강변한다. 그러면서 ‘소의 구조’를 아는 포정은 칼을 부러뜨리지 않고 백 마리의 소를 가를 수 있다고 쓰고 있다. 그런 포정의 칼처럼 그는 날카로운 커서를 들이대고자 한다고 고백한다. “나는 혐오하는 것들을 기억하기 위해, 잊지 않기 위해 소설을 쓴다. 거칠게 말하면 소설은 내게 ‘분노의 텍스트’이다. 소설쓰기는 그러므로 내가 싫어하는 세상, 혹은 세상의 싫은 것들과 화의하는 정략적인 방식이다.”(2004년 11월 12일)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혐오’보다 더 멋있고 세련된 말이 ‘저항’인데 일부러 저항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은 ‘혐오’라는 말에는 장식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투명해서, 설명을 요구받지 않는 말쑥한 칼날 같아서 ‘혐오’가 좋고 ‘저항’은 어딘지 모르게 정치 같고 외교 같아서 싫다는 그의 접근법은 적을 많이 베어본 칼잡이의 그것을 닮아 있다. 예전에 그의 소설을 읽을 때는 이런 기개를 발견할 수 없었는데, 잘못 읽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그가 일기에 털어놓은 상념들은 깊고도 푸르러 앞으로 그의 소설들은 사람을 살리는 칼날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을 갖게 한다.
한편으로 그와 교우하고 있는 문단의 여러 작가, 시인들도 등장하고 있다. 소설가 김승옥 김훈 이인성 고종석 이순원 원종국 한차현, 시인 천양희 김정환 황인숙 안현미 송승환 신동옥 등 언급된 작가 또한 그의 든든한 자산임에 틀림없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